강원도 고성에서 일주일 머물기
나는 말랐다. 많이 말랐다. 그렇게 타고 태어났다. 웬만해선 살이 찌지 않는다. 한 끼만 안 먹어도 바로 빠진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밥맛부터 없어진다. 그런 내가 인생에서 딱 두 번, 살쪘던 때가 있다. 바로 미국에서 교환학생 했을 때와 런던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던 때다. 그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런던인데, 그때는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필요가 없을 만큼 마음이 편하고, 재밌고, 내 하루에 집중했던 때였다. 마음이 좋으니 살도 쪘다. 그래서 귀국한 뒤 런던 생활을 오랫동안 그리워했다. 내가 정말 큰 노력을 하지 않는 이상 런던은 어쩌면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곳인 것만 같았고, 그럼 그때만큼 마음이 편했던 때도 이젠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올 3월, 런던만큼 날 편하게 해주는 곳을 찾았다. 바로 강원도 고성이다.
작년 여름, tvN에서는 배우 정유미와 최우식이 출연한 예능 <여름방학>을 방영했다. 강원도 고성에서 두 배우가 한 달 살기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방학 동안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하루 한 끼 건강한 식사하기/하루 1시간 운동하기/매일 일기 쓰기가 다였다. 조용하면서도 소소한 재미가 넘쳤고,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잇몸을 내놓고 미소 짓게 만드는 프로그램이었다. 방영이 끝난 뒤에도 인터넷에서 수도 없이 돌려봤고, 고성에 가고 싶다는 마음은 시청 횟수에 비례해 차곡차곡 쌓여갔다. 복잡한 서울에서 쉬는 것이 쉬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마음에 박혔던 3월의 어느 날, 한 달은 너무 비용이 많이 드니 일주일만 고성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마음을 먹으니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고성에 있는 펜션 중 한 군데를 골라 일주일 예약했고, <여름방학>에 나왔던 서핑 샵에도 연락해 서핑 수업을 신청했다. 면허가 없는 나는 이동 수단으로 자전거를 생각했는데, 고성에는 빌릴 곳이 마땅치 않아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핑 샵 사장님께 물어봤는데, 감사하게도 너무 흔쾌히 가게 자전거를 빌려주겠다고 말씀하셨다. 해외여행이 아니니, 그 외엔 별다르게 준비할 것도 없었다. 일주일 뒤, 캐리어 하나와 크로스백 하나를 메고 강원도행 버스를 탔다.
고성에서의 매일은 대략 이러했다. 아침 9시쯤 일어난다. 세수도 하지 않은 채로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거나 침대에 누워 펜션 바로 앞에 펼쳐진 바다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씻고 나갈 채비를 한 뒤, 동네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오후에는 파도가 괜찮은 날은 서핑, 서핑을 할 수 없는 날은 자전거를 타고 고성을 둘러보았다. 오후 4-5시쯤 집에 돌아오면 낮잠을 한숨 자고 난 뒤, 다시 자전거를 타고 동네 골목을 다니거나 근처 카페에 가보았다. 그리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해 먹고 tv를 보거나 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 하루는 24시간인데 하루 종일 크게 하는 것이 없다 보니 시간은 남았고, 모든 일을 천천히, 느리게 원하는 속도에 맞춰 하게 됐다.
막 서울에 돌아왔을 땐 생생했는데, 이젠 두 달쯤 지나 그런지 몇몇 장면들로 기억에 남아있다. (그때 매일 글을 썼다면 좋았을 텐데) 사람도, 자동차도 많이 없던 숙소 앞 교암 해변, 3월이라 조금은 차가웠던 바닷물, 파도타기에 성공했을 때 내질렀던 고함 소리, 물을 무서워하지만 바닷물로 다이빙했던 때, 숙소 침대에 누워 직관했던 바다 일출, 등산했다가 사람이 없어 겁먹고 후다닥 내려왔던 운봉산, 매일 자전거 타며 신나게 불렀던 노래들..
그곳에 있는 일주일 동안 딱 하루 고성에 관한 짧은 일기를 썼는데, 그건 ‘무섭다’는 내용이었다. 고성으로 가기 전, 내 마음속에는 ‘도피’라는 단어가 가득했다. 어디로든 사람 없는 조용한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 한편에 ‘혹시나 나중에 고성에서 살게 되진 않을까?’ 하는 질문을 품고 떠났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고성은 좋았고, 묶여있던 나를 풀어놓았다. (일주일밖에 머물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너무 좋아, 문득 무서워졌던 것이다.
지금은 안다. 물론 고성에 가서야 평온함을 느낀 것처럼 공간이 주는 힘은 크지만, 그보다 중심을 잡고 바로 선 ‘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공간이 바뀐 것 외에는 나는 그대로 나일 뿐이기에 서울에서도 고성에서와 같은 마음으로 지낼 수 있다. 하지만 복잡한 곳에 있다 보면 그러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반대로 고성에 있다 해도 서울에서와 같은 마음으로 지낼 수도 있다. 어느 곳에 있든 ‘내’가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으로 직접 깨닫고 나니, 서울에 와서도 이전보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예전엔 짜증 나기만 했던 쌩쌩 지나다니는 배달 오토바이도 지금은 지나가는 내 일상의 한 장면으로 보게 된 것처럼 말이다.
고성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마지막인데 자전거를 못 타겠구나’ 하고 있는데, 해가 났다. 먹구름이 걷히던 하늘, 구름 사이로 내려오는 햇빛에 빛나던 바다, 그리고 아스팔트에 고인 빗물을 가로지르며 자전거를 타던 나. 고성을 떠나면서 가을쯤 또 오자고 생각했다. 바쁘게 지내는 요즘, 여유로움을 그리워하다가도 멀지 않은 곳에 언제든 가면 나에게 편안함을 주는 공간이 있다고 생각하면 든든하다. 지척에 마음의 고향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