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예찬을 빙자한 여름 예찬, 아니 실은 슈톨렌 예찬
삐질삐질 땀이 흘렀지만 기어코 두꺼운 옷을 덧입고 매무새를 다듬었다. 오븐 안 온도가 섭씨 200도를 넘는다는 걸 상기하면서 말이다. 이번 여름엔 절대 넘어지지 않기로 한 다짐도 되뇐다. 누군가는 헤어질 결심을 했고 나는 다치지 않을 결심을 했다. 마치 게임 속 가상현실처럼 오늘 나에게 세 개의 목숨별이 주어졌다면, 나흘 째 폭염이 지속되는 지금은 단 하나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니 집요하고 절박해질 수밖에 없다. 살기 위해 습득한 기술을 떠올려 허리와 어깨가 아닌 등과 엉덩이 그리고 다리에 힘을 꽉 주었다.
말캉한 새벽 공기를 제외하곤 여름은 내게 늘 이런 식이다. 단단한 긴장의 연속이다. 가게를 운영한 이후부터 여름은 공포의 계절 그 자체였다. 더위를 이기지 못해 휘청거리는 이 몸에 크고 작은 화상을 입히는가 하면 멀쩡한 반죽을 떨구는 것쯤은 큰일도 아니니 말이다. 날씨는 또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특히 올해 여름은 비가 잦았다. 재미가 있어도 느낄 여유 따윈 없다.
그나마 여름의 묘미가 딱 하나 있긴 한데, 그건 바로 낮이 길다는 것이다. 퇴근 후 이런저런 집안 잔일을 마치고 저녁까지 챙겨 먹는 여유를 부리다가 러닝화를 신어도, 하늘엔 해가 달랑달랑 걸려있다. 뜨겁고 축축한 공기를 가르며 달리면 온몸에 여름이 찰싹 달라붙는다. 온몸에 줄줄 땀이 흐르고 두 발은 마치 억겁의 시간을 달리는 것처럼 지루하고 괴롭긴 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언젠가 이 지겨운 여름도 끝이 나겠지 하는 기대와 오늘의 무탈함에 대해 발을 구르며 번갈아 상기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달리기는 건강한 신체 단련 기능 그 이상, 그러니까 기특한 행위임이 틀림없다. 이마저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로 여름을 증오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디에 있든 개선문은 달릴 맛이 난다. 먼 곳에서 보면 저 장난감 같은 것이 어느새 눈앞에 웅장하게 펼쳐지는데 잠깐은 그 아우라에 떨떠름해질 때가 있다. 생각보다 커서 기괴하다 하면서도 개선문을 중심으로 펼쳐진 양갈래의 길을 따라 군중의 역사가 펼쳐진 곳임을 새삼 떠올려본다. 시대극의 대서사가 머리를 스친다. 하여간 숨이 차니 별별 생각이 든다. 다시 숨을 고른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아무리 숨이 차올라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건 여행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익숙한 속도로 달려도 결국 이곳은 낯선 곳일 뿐이다.
분명 오전 열 시만 지나도 사람이 바글거리는 곳인데 이 새벽엔 고요하다. 나와 같이 뛰는 몇몇 사람과 나뒹구는 와인병과 맥주캔, 담배 냄새와 오줌 지린내가 짝을 이뤄 지독한 냄새를 뿜지만 신경이 쓰일 정도는 아니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속도로 뛰면 이런 여유가 생긴다. 뭐든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자비가 생기는데, 평소엔 없던 일이다.
한참을 뛰다가 빵집을 발견하면 속도를 늦추게 되는 건 빵집 주인의 숙명이랄까. 영화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 눈에 띈다. 누군가 기다란 바게트를 품에 안고 나서는 모습인데 어째 아침치곤 꽤 여유롭고 한가로운 모습이 인상적이다. 순간 한국에 있는 나의 가게가 떠올랐다. 가게를 나서는 손님의 뒷모습을 보며 이따금 그 얼굴을 상상하곤 하는데, 내 빵을 품에 안고 나서는 모습을 정면에서도 보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그렇다고 당장에 뛰쳐나가 앞을 막아설 순 없으니 그 얼굴은 그저 상상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지구 반대편인 이곳을 뛰며 나는 ‘상상이 아닌 현실’의 얼굴을 마주한다. 걷는 것보단 빠른 속도로 우리와 같은 듯, 다른 일상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낯선 곳에서 달리려는 이유이자 놓칠 수 없는 재미다.
코너를 돌아 페이스를 올렸다. 호흡은 더 거칠어졌고 의식의 흐름 또한 짧고 빨라진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이 툭툭 끊어졌다. 그 시작이 '구구절절'한 우려라면, 끝은 늘 성의 없는 ‘단답’의 연속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다시 한국에 돌아가면 새벽부터 시작하는 일상에 다시 적응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얼마나 지나야 적응할 수 있을까, 과연 내 손은 그 기술을 기억해 낼 수 있을까, 그나저나 당장 러닝을 끝내면 뭘 먹지? 맛있다는 그 집에 갈까, 예약도 안 했는데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구구절절 이어지다가, 결국 에잇! 일단 완주부터 하자는 결론에 다다르는 것이다.
생각의 속도 못지않게 머릿속엔 초시계가 부산스럽게 째깍 거린다. 이 정도쯤이면 삼백 미터는 나아갔겠지 하고 시계를 보면 어림도 없다. 그렇게 반복 또 반복이다. 오랫동안 해왔던 고민을 어렵사리 꺼내놓아도 발을 구르는 템포에 맞춰 뚝뚝 끊어지기만 한다. 이렇게 숨이 차 미치겠는데, 지금 그게 의미가 있어?라는 대답만이 머릿속을 맴돌 뿐이다.
한참을 그렇게 뛰다 보면 어느덧 뜨거운 여름은 차가운 겨울에 가 닿아있다. 자연스럽게 겨울 슈톨렌이 떠올랐다. 이맘때면 늘 하는 고민이다. 이것도 올해로 벌써 세 번째다. 첫 해는 (파네토네의)실패로 얻어걸린 (슈톨렌의)성공을 자축했고, 두 번째 해는 이 달콤함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는 축배에 만취해 있었다. 그렇다면 세 번째는? 세 번째 슈톨렌을 굽는다는 건 삼 년째 빵집을 운영하고 있다는 방증인데, 솔직히 말하면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 빵집의 실패를 염두했다기보다는 그냥 좀 먼 얘기 같아서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거 같다.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페이스를 한 템포 올렸더니 호흡이 더 가빠졌다. 세 번째 슈톨렌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발을 구를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 몸은 더 가벼워졌다. 시쳇말로 이게 바로 '도파밍'인 건가. 세 번째 라니!!!!
손목에 진동이 울렸다. 오늘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알람이다. 러닝을 마치면 커피를 마셔야지 했던 계획 따위는 고이 접어서 한참을 달리던 센 강에 던져버렸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그대로 어딘가에 걸터앉았다. 러닝화를 벗고 발을 조몰락대면서 반짝반짝 빛나는 강물을 바라봤다. 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도 저 강물 못지않게 빛났으리라 믿으며 스스로 멋진(질) 모습에 흡족해한다. 긴 숨을 몇 번에 걸쳐 내몰아 쉬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연초부터 럼에 절여둔 건과일부터 살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세 번째 슈톨렌엔 어떻게든 이 여름을 담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약 한 달간, 나는 보이지도 않는 목적지의 파이널 테이프를 몇 번이나 끊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청귤을 발견한 건 행운이다. 한 달간의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가게부터 들렀다. 여름내 방치된 그곳은 열기가 바짝 올랐다가 식은 모습이었다. 이틀에 걸쳐 청소를 하고 장을 보러 갔다. 이맘때, 그러니까 늦은 여름에만 만날 수 있다는 청귤이 눈에 띄었다. 비타민, 면역 강화 등 청귤의 순기능 따위는 눈에 들지도 않았다. 오로지 ‘늦은 여름’만 둥둥 떠올랐을 뿐이다. 슈톨렌엔 시트러스계 과일의 껍질(필peel)이 들어가는데, 오렌지나 레몬 등 외국 재료에만 의존해야 했던 것이 해마다 내심 마음에 걸렸었다. 물론 그냥 껍질째 넣는 것이 아니라 설탕에 오랫동안 졸이는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오랜 고민이 해결될 수 있다면 이까짓 번거로움은 충분히 감내할만했다.
청귤을 박박 씻고 껍질을 벗길 때만 해도 몰랐다. 내가 이번 여름을 얼마나 남기고 싶었는지 말이다. 아무리 손끝이 아리고 누렇게 떠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반나절을 끓여도 뚝뚝 떨어지는 설탕물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하루를 재고, 다음날 다시 끓였다. 바글바글 끓던 설탕물의 점도가 어째 조금 진득해졌다만 여전히 부족했다. 그리고 하루를 더. 셋째 날이 되어서야 조금 나아졌나 싶었지만 하루가 더 필요해 보였다. 나흘 째, 마침내 청귤피와 설탕물이 한데 엉켜 찐득하고 눅진하게 절여졌다. 단단하면서 젤리 같은 식감, 그리고 달아나지 않은 청귤의 향까지. 이만하면 겨울 슈톨렌에 넣을 자격이 충분하다. 다 됐다. 그렇게 안도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긴긴 여름이 끝이 났다.
처음이었다. 가게를 낸 이후 이렇게 여름에 대해 곱씹어 보려는 것이 정말 처음이었다. 하긴 지난여름이 괴로웠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다가올 여름이 꼭 그럴 것이란 법은 없었다. 양팔 안쪽에 선명했던 화상 자국이 옅어진 것도 그제야 발견했다. 매일아침 다치지 말자고 한 다짐도 헛되지 않았음을 100km를 넘게 뛴 내 두 발이 앞다퉈 말했다. 오랫동안 애써 꺼두었던 여행 스위치가 켜지고, 그게 나라는 인간을 움직이게 한다는 걸 다시 가슴에 그은 것도 올해 여름이었다. 그저 작년과 똑같이 빵을 굽고 달리며, 여름을 다듬어 겨울을 준비했을 뿐인데, 올해 여름은 좀 달라져있었다.
이쯤에서 내년 여름이 벌써 기대된다는 전개가 펼쳐지길 (나 또한 몹시)바랐다. 사실 그런 골자로 몇 줄의 문장을 쓰다가 고치고 결국은 지워버렸다. 고백하자면 아직도 나는 '여름'하면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단어만 떠올려도 그 특유의 뜨겁고 습한 작업실의 공기가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다. 한 해가 다르게 체감되는 이상기후도 심상치 않다. 지금으로선 그저 내년 여름에도 나는 여전히 낯선 곳을 달리며, 겨울 슈톨렌을 준비할 거라는 계획만 있을 뿐이다. 다치지 말겠다는 우울한 긍지를 벗삼아. 그래도 여름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없어졌다. 그렇다고 기다려지지도 않는다. 여하간 이만하면 됐다.
이렇게 올여름에도 삐쩍 가문 나에게 쪼르르 물줄기를 따라주었다.
그러니까 그게,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다.
분명 겨울인데 별안간 여름 타령에 이게 뭐지 싶은 분도 계시겠죠? 이번 슈톨렌엔 제겐 큰 의미로 다가온 이번 여름을 담고 싶었어요. 제일 싫어하는 여름을 상기하는 건 저로썬 참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 모든 경험은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