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농부에 대한 기록
계절이 바뀔 때마다 우리 엄마의 전화통엔 불이 난다. 일명 옥수수 아저씨, 현미쌀 아줌마, 서리태 아저씨, 천일염 아줌마 등 전국의 수많은 아저씨와 아줌마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 까닭이다. 전국팔도에 걸쳐 그 이름이 하나씩 있다. 그런 엄마의 전화부가 부러웠을까. 나도 때가 되면 전화하는 사람이 있다. 그의 옥수수를 먹고 넘어가지 않으면 그 해 여름엔 유죄다. 올해는 그에게 다른 용건으로 전화를 했다. 일명 '대표님'.
십 년 전 사업 진행 실무자와 작목반 대표로서 그를 처음 만났다. 지금은 직거래 구매자로서, 그의 토마토를 구하기 위해 봄부터 그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지 모르겠다.
물 좋고 산 좋은 양평에서 삼십 년째 농사를 짓는 농부 노국환 대표. 뭇 유명인사나 사업가의 인터뷰는 세상에 차고 넘쳐나는데, 내가 아는 농부의 이야기는 없다. 그래서 직접 기록한다. 한여름을 새겨 넣는 지극히 개인적인 아카이빙이긴 하지만, 반면 최대한 많은 이가 읽었으면 하는 건 욕심일까.
여러 버전의 글을 썼지만, 지루하고 딱딱해도 문답 형식을 택했다. 한껏 멋 부린 낱말이 어째 좀 머쓱했다. 이 글을 읽겠다고 결심했다면, 부디 끝까지 보길 바란다.
Q. 한여름이다. 그야말로 농번기다. 어떻게 지내시나.
새벽부터 분주하다. 볕이 뜨거워지기 전에 밭일을 해야 해서 일찍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한여름이라 채소가 쑥쑥 자란다. 게다가 나는 노지 자연농사(비닐하우스나를 짓지 않고, 화학비료, 농약 등 인위적인 재배방식을 배제하는 농법)를 추구하지 않나. 이 더운 날 나만 지치겠나, 열매도 잎도 다 지친다. 그러니까 더 때에 맞게, 늦지 않게 밭을 돌봐야 한다. 여하간 그날 딸 것들을 다 따면, 농산물꾸러미(정기 농산물 구독 서비스)를 위해 집품하고, 근처 생협에도 갖다 놓는다. 해가 중천이면 그날 일이 얼추 마무리된다.
덕분에 긴 하루를 보내고 있다.
Q. 한때는 땅에 씨앗을 심으면 절로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는 줄 알았다. 물론 농부의 역할과 그 노고를 아예 몰랐다는 건 아니지만, 이 더운 날에도 매대에 진열된 번쩍번쩍 채소와 과일을 보면 바로 이 상황을 떠올리긴 어렵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럴 거다. 최근 들어 소비자와의 관계 변화를 느끼는가.
코로나 이후로 많은 것이 변했다. 예전에는 농촌에서 행사나 체험 활동을 열면, 가족 단위로 많이 왔는데 요샌 참여율이 현저히 낮아졌다. 게다가 사람들은 ‘가족’, ‘공동체’ 단위의 활동보다 ‘개인’, ‘소규모’를 지향하는 추세인 것 같다. 그러니 이런 단체 활동을 선호하지 않는다. 예전에 비해 소비자를 직접 만날 기회가 줄어든 것이다.
한 가지 더, 확실히 채소 소비가 덜한 것 같다. 식생활이 바뀐 것도 한몫한다. 그리고 젊은 소비자를 만나기 어렵다. 그에 비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연령대가 높아지고 있다. 갈수록 (농부와 소비자의) 간극이 더 커지는 느낌이다.
Q. 아마 요새 사람들은 개인의 취향이나 선호, 혹은 자극에 따라 움직이는 성향이 강해서인 것 같다. 거기에 SNS를 중심으로 콘텐츠를 따라 (온라인으로) 모이고 또 흩어진다. 말씀하신 대로 코로나 이후로 대면 만남이 부담스러워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주변에서 SNS를 권한다. 가끔 적채가 되면 SNS에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꾸준히 관리하기가 쉽지도, 익숙하지도 않다. 게다가 경험을 비교하는 게 익숙한 세상 아닌가. 그런 것을 고려하면 농촌에서의 경험이 얼마나 비교 우위에 있을지 싶다.
앞서 말한 대로 예전에는 꼭 SNS가 아니더라도 일을 벌이면(행사나 축제를 열면), 많은 사람들이 와서 즐기곤 했는데 이젠 농촌 사람들이 거의 오질 않는다. 그 인기 많던 딸기 농장 체험도 참여율도 많이 낮아진 걸로 안다. 그래도 사람들(소비자)을 자주 만나야 할 텐데, 솔직한 말로는 요새 일을 벌이기가 걱정부터 된다.
Q. SNS의 장단점이 확실한 것 같다. 최근에 SNS의 도움을 받은 적도 있다던데.
그렇다. 지난겨울 고구마가 창고에서 썩을 뻔했다. 생산량이 많아서 주 판로인 근처 생협에 시세보다 조금 낮은 가격에 수매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당시 정부에서 소비자에게 농산물 할인 쿠폰을 지원했는데(농산물 출하량 증가로 소비 촉진을 위한 할인 지원 제도), 오히려 그 제도 때문에 내 고구마는 팔지도 못하고 뒷전으로 밀려났다. 어떻게 된 일인고 하니, 그게 일종의 ‘판매 코드’가 잡혀야 할인을 적용받는데, 나는 소규모 농가라 그 코드가 잡히질 않았던 거다. 소비자는 당연히 할인쿠폰이 적용되는 상품을 원하는 게 당연하다. 그렇게 아 이마저 안 되는구나 하는 순간, 어느 발 넓은 분이 본인 SNS에 내 사정을 설명하는 글을 올린 거다.
Q. 맞다. 그래서 나도 그 고구마 샀다. 정말 맛있었는데.. 그래서 저도 올릴까요 하니까 벌써 다 팔렸다고 하셨다(웃음).
오랫동안 끙끙 앓던 것이 그렇게 며칠 새 해결되는 것을 보고 SNS의 장점에 대해 알게 된 거다. 잘 활용하면 오히려 나같이 소규모 농부에겐 좋은 일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그렇게 본인 플랫폼을 잘 활용하는 농부도 있는 걸로 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Q. 비록 지금은 얼굴을 몰라도 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다고 들었다. 지난 삼십 년 동안 누군가의 밥상에 끊임없이 기여해 왔는데, 기억에 남는 일이 있는가.
물론. 해마다 전화로 내 배추를 구입하던 소비자가 있었다. 배추를 심을 때가 되면 꼭 가을장마가 시작되는데, 그렇다 보니 젖은 밭에다 어쩔 수 없이 배추를 심게 된다. 그러다 날이 추워지면서 진 밭이 딱딱해지니까 배추 뿌리의 발육이 덜 된다. 어쩔 때는 그 과정에서 배추에 쓴 맛이 날 때가 있다. 여하간 그 해 배추가 좀 썼나 그랬을 거다. 그 이후로 한 번 더 그랬나.. 우연인지 그 후로는 그 손님이 주문을 하지 않는다(웃음). 사실 인위적인 방식 마다하고 땅과 열매에도 좋다는 유기농법을 고수하면서 정작 맛이 잘 들지 않으면 농부로서 그렇게 자존심이 상하고 그렇다. 이후에 배추씨를 심을 때마다 그분이 생각난다. 올해 잘 되면 그냥 공짜로 가져다 드릴까 하는. 그동안 맛있게 먹어준 게 정말 고마우니까.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Q. 결국 그런 에피소드는 역시 직거래로부터 이루어지는구나 싶다. 그렇다고 이 시대에 모든 농산물이 직거래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기에는 유통 플랫폼이 거대하고, 소비자로서는 이용하기 편하기도 하고.
그러면 결국 유기농, 제철이라고 하는, 그러니까 대표님과 같은 ‘다품종, 소량생산’하는 분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모든 시스템이 너무 대형 농업, 대형 유통 중심으로 짜여있다. 아까 말한 고구마의 경우를 봐도, 그나마 농부친화적이라는 로컬푸드 매장이나 생협에 출하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거다. 아마 소비자와 더 멀어지게 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거 같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GAP니 무농약이니 유기농이니 하는 인증제에 기대어 농산물의 정보를 얻곤 한다. 그 마크를 보고 농산물을 판단하지 어느 농부의 무엇으로 판단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소비자 입장에서는 합리적 소비만 하면 되고, 더 이상 서로를 알 필요도 없다.
사실 인증제가 오히려 우리에게 편한 것도 있다. 일일이 이건 유기농, 이건 무농약 이런 설명을 하느니 인증 하나로 딱 알아주니까 더 편한 측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인증제 자체는 ‘결과 중심’이라 농부로서 좀 아쉬운 부분이 있다.
그리고 아무리 적기에 농사일을 한다고 해도, 농사라는 게 맘처럼 잘 안될 때가 있다. 관행농이나 유기농, 무농약, 그리고 나처럼 제철 노지농사를 짓는 농부 모두는 잘 알 거다. 그럼에도 유통계에서는 ‘지속 공급, 안정 출하’만을 요청한다.
Q. 인증제에 대한 우려를 언급했는데, 어떤 부분인가.
유기농에 대한 국제 기준만 보더라도 비닐하우스가 농지의 (정확하지는 않지만) 10% 미만 일 때, 인증 조건을 채우는 거라고 들었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비닐하우스는 되고, 농약과 화학비료만 쓰지 않는다고 유기농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말 그대로 '유기'라는 의미는 유기적인 관계, 조직, 균형을 말하는 것이다. 유기농은 땅과 사람의 관계에 대입해 보면 그 뜻이 선명해진다. 비닐하우스 유지를 위해 부가적인 자재를 쓰고, 화석 연료를 뗀다면 땅과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게 전부는 아닐 텐데 말이다. 애초에 유기농법이라는 것이 근대화, 산업화를 거치면서 무차별적으로 농약을 사용하다가 사람에게도, 자연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어 이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한 것인데,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게다가 유기농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의 ‘과정’보다, 농약 검출 여부, 경과 시간 등을 위주로 보는 ‘결과’ 중심인 것도 아쉬운 마음이 있다. 이 방식을 유지하는 게 과연 지속가능할까.
Q. 그럼에도, 일명 농사씬의 끝판왕이라는 제철, 노지 농사를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나라 인증제라는 그릇에 담기엔 음식이 꽤 큰 셈인데.
먹을거리를 위하나, 농업을 위하나 제철 농사를 짓는 것이 더 나은 길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건 농부 본인의 권리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지속가능한 농사를 짓겠다고 결심하고, 그 권리를 지킨 것이다. 농사도 '업'이다. 최종 책임과 권리는 농부 본인에게 있는 거다. 삼십 년을 해보니 이런저런 노하우가 생기기도 했다.
작물이 크는 데에는 수분, 양분, 온도 세 가지 조건이 잘 맞아야 한다. 이걸 인위적인 방법 없이 맞추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지력 유지작물(수확을 목적으로 심는 것이 아닌 땅심을 키우기 위해 심는 작물)을 심거나, 혼합 유박을 사용한다거나, 최소한의 비가림(시설)을 한다거나 하는 등 지난 삼십 년간 별별 방법을 써봤다. 수차례 시행착오를 겪다가 우연찮게 효과적인 방법을 찾기도 하는 게 농사다. 올해는 토마토가 그렇다. 이제 농사를 좀 알 것 같다.
Q. 귀를 의심했다. 삼십 년차 농부인데, ‘이제’ 농사를 알 것 같다니.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웃음).
진짜다. 농사라는 게 농부마다 자기만의 방식이 있다. 아무리 같은 채소라도 농부마다 키우는 방식이 약간씩 다르다. 땅심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 그래서 다른 농부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게 쉽지 않다. 오로지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기 땅에 대해 잘 아는 것만이 방법이다. 한 삼 년간 해서 잘되면 이 품목은 이렇게 하는구나, 하면 이 방식이 맞는구나 할 텐데 이듬해엔 같은 방식으로 해도 틀어지는 게 농사다. 특히 나는 여러 품목을 소량씩 생산하다 보니 해마다 품목이 약간씩 바뀌기도 해서, 데이터를 축적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올해는 토마토 감을 좀 잡은 거 같다. 이제 좀 알 것만 같다.
Q. 십 년 전 대표님 토마토를 정말 맛있게 먹었던 이로썬 이런 비하인드가 있는 줄 몰랐다.(웃음) 올해도 그 토마토를 맛볼 수 있어서 기쁘다. 마지막 질문이다. 한여름에 이 농산물만은 꼭! 먹어야 하는 채소를 알려주시라. 일명 노국환의 픽!이라고 할까.
토마토, 호박, 가지, 고추, 호박순, 깻잎, 오이, 양배추. 이것들이 한여름에 가장 영양이 꽉 차고 맛이 좋다. 가장 많이 수확이 되어서 가격도 싸다. 되레 엽채류는 봄, 가을이 제철이다. 지금 시장이나 마트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채소가 그야말로 '제철'이다. 싼데 일 년 중 영양이 꽉 들어 차있기도 하다. 제철에 난 채소는 그 시기 우리 몸에 필요한 채소이기도 하다. 제철 채소를 먹는 건 값비싼 한겨울 과일을 사 먹는 것보다 소위 훨씬 '합리적인'소비일 거다. 가장 싼 채소를 많이 드시라. 이거면 충분하다. 여름 보양이랄 것이 따로 없다.
글을 정리하다 보니, 내 질문이 얼마나 우매한 지 알게 되었다. 지난 삼십 년간 그는 이미 숱하게 자문하며 몸소 그 답을 실천해 왔을 텐데, 마치 이미 색이 다 바랜 질문을 한 것만 같았달까. 오랜만에 와서는 내가 뭐라도 되는 양 그에게 질문을 쏟지 않았나 하는 우려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우매함에 현명하게 답해주었다. 나는, 아니 도시의 우리는 언제쯤이면 그들에게 현명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오늘 밤도 축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