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해도 달달하게 즐기자
"계산할 때는 몰랐는데, 다하고 나니까 중국산인 걸 봤지 뭐야."
장을 보고 온 남편은 꽤 놀란 눈치였다. 결제까지 하고 나서야 양배추가 중국산인 걸 확인했다면서 당황스러워했다. 이를 어떻게 할까 거듭 고민 끝에 결국 다시 마트로 돌아가 환불했다. 지금 이 상황에 중국산이라도 귀한 것이라 그냥 먹을까 했지만, 한 통에 사천 원이 넘는데 같은 가격이면 다음날 국산 양상추를 사 먹는 것이 낫겠다 판단한 것이다.
한편, 머릿속에 갖은 계산을 해둔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렇다고 다른 음식을 하자니 그것도 내키지 않았다. 생협 매장에 가면 매대가 텅 비어있거나 마트의 채소는 가격이 너무 올라서, 하릴없이 냉장고 안에 있는 식재료를 조합해 만들겠다는 것이 바로 이 샌드위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뭐니 뭐니 해도 샌드위치의 킥은 아삭한 양상추인데 생각할 수록 아쉬웠다. 예전에 만들어 둔 수제 패티와 치즈, 그리고 아삭한 양상추 두어 장을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치아바타 사이에 넣어 심플한 맛의 샌드위치를 만들 요량이었다. 남은 양상추는 다이어트가 절실한 요즘 다른 재료를 곁들여 샐러드로 즐기면 딱이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냉장고 안을 살폈다. 채소라고는 양파 반 조각과 양배추가 있었다. 아, 거기에 방울토마토까지. 세찬 소리에 창밖을 내다보니 잠시 그쳤던 비가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퇴사 2개월 차, 그러니까 고작 두 달이 지났을 뿐인데 나는 많은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였으면 재해에 관한 기사를 찾아보고, 또 이를 조합원(소비자)에게 어떻게 알릴지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생협에 근무하는 7년 동안 초기 이삼 년을 제외하고는 이맘때면 들려오는 생산지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어이없는 것이 어느 해는 물이 넘쳐서, 또 어느 해는 물이 없어서 생기는 일들이었다. 보통 생협은 이런 재해를 대비해 생산안정기금과 같은 대비책을 마련해두고 있지만, 해가 갈수록 그 피해가 커져 전부를 커버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 상황에 대해 조합원(소비자)에게 알리고, 피해 복구를 위한 모금을 하기도 한다. 작년 이맘때엔, 그러니까 실무자로서 나는 텅 빈 매대에 당황해하지 않고, 피해 기사를 모니터링하면서 상황을 주시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기도 하고 모금에도 참여했다. 작년에도 그랬고, 재작년에도 그랬다. 그 사이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고 하늘은 시꺼메졌다. 꼬르륵- 자책만 하고 있기엔 배가 너무 고팠다.
남은 반 개의 양파는 얇게 썰어 갈색이 될 때까지 오랫동안 볶았다. 원래 양파는 찬물에 담가 아린 내를 없애면 몇 조각만으로도 느끼한 패티의 맛을 잡아주는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만, 지금은 워낙 속재료가 부실해서 냉장고에 남아있던 전부를 볶아야만 했다. 양배추는 최대한 얇게 썰어보려고 했으나 보기 좋게 실패해 애매한 굵기가 되었다. 토마토도 없지만 얇게 저민 방울토마토가 제 몫을 해냈다.
"와, 진짜 맛있다."
양상추 대신 양배추가 끼인 샌드위치를 들어 올리자마자 양배추 조각이 덤성덤성 떨어졌다. 흩어진 조각을 잽싸게 주워 입으로 가져가던 남편은, 오히려 서걱서걱 씹혀서 맛있다고 했다. 그의 손에 걸린 너덜한 샌드위치를 보니 씁쓸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두께는 여유의 척도'라던 나의 샌드위치는 다시 얇아져 있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아서 차마 채우지 못한 그때의 샌드위치와는 상황이 달라 씁쓸해지기까지 했다. 적어도 그때 그 얇은 샌드위치는 순전히 내 의지로 선택한 것이었다. 이젠 그 사이를 꽉 메울 정도의 여유는 되었는데, 그조차 '어쩔 수 없는 영역'이 되어버렸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의식은 저 멀리에, 그리고 한숨은 깊어졌다. 고작 샌드위치의 두께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이라며, 비록 그게 비약일지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빗줄기는 더 거세졌고 창밖 세상을 뒤덮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더하다(매해 이맘때쯤에 하던 말이다). 급기야 엄마는 그 좋아하는 여름 김치를 담그지 않겠다 선언했다. 여름 열무의 가격이 다른 해보다 유독 올랐다는 것이다.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복숭아 생산자님의 복숭아도 겨우(?) 달았다. 빗물을 머금은 과육이 밍밍 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사실 이렇게 폭우와 폭염, 태풍 피해에 대한 우려를 담은 기사는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 19라는 초유의 사태로 우리의 관심은 수해에 둘 여유가 더더욱 없다. 간간이 보이는 기사에는 이전이었으면 흔했을 비아냥대는 댓글 조차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하긴 나조차 이제 필드에서 한 발짝 멀어졌다고, 농업 관련 기사를 찾아본 본 지 오래인데.
단단해도 달달해요
지금 우리가 즐겨야 할 샌드위치
준비물 | 빵 두 장, 마요네즈나 홀그레인 머스터드, 냉동 패티류, 그리고 단단한 채소 모두 ok! 이 외 기호에 따라 치즈, 피클, 다양한 소스 등
냉장고 채소 칸을 열어 상황을 확인합니다. 태풍이 훑고 간 이때쯤에는 대개 오래도록 보관해도 괜찮은 양파, 양배추, 당근, 방울토마토와 같은 단단한 채소가 대부분일 겁니다.
아삭한 양상추나 부드러운 로메인 등의 잎채소가 샌드위치의 킥이긴 해도, 이 단단한 채소만으로도 충분히 맛있는 샌드위치를 즐길 수 있습니다.
부실한 채소 대신 냉동실에 하나쯤은 있을, 패티가 될만한 것들을 찾습니다. 저는 꽤 오래전 만들어둔 소고기+돼지고기 반을 섞은 패티가 있었지만, 너겟이나 생선가스, 돈가스 류도 좋습니다. 물론 햄도 좋지만 아무래도 데운 채소와 어울리는 건 두툼한 패티류가 아닐까 싶어서요.
얇게 썬 양파를 갈색이 될 때까지 수분을 이용해 꽤 오랫동안 볶아줍니다. 양파는 아린 내가 사라지고 달달함만 남습니다. 양배추도 수분이 날아가고 흐물 해질 때까지 볶아줍니다. 이렇게 단단한 채소는 볶으면 볶을수록 달달해집니다. 이때, 소금과 후추로 살짝 간을 해줘도 좋습니다.
마요네즈를 빵 안쪽에 얇게 바릅니다. 물기가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니까 과도하게 바를 필요는 없어요.
순서 상관없이 준비된 모든 재료를 빵 사이에 차곡차곡 쌓습니다.
내용물이 워낙 조각조각 나 있는 상태이니까 가급적 편한 마음으로 '오픈 샌드위치'로 즐깁니다. 먹다 보면 이게 버거인지, 샌드위치인지 헷갈리겠지만요.
한국농어민신문 기사에 따르면, 코로나 19와 자연재해가 상당기간 농업 소득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했다. 여기에 외국인 노동자 입국 제한으로 일손 부족, 여기에 노무비 인상, 농산물 판로 위축 등으로 인해 농업 소득 감소가 우려될 수밖에 없어 설상가상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재해 보험금 지급 등의 피해 보상 절차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말이다. 거기에 해마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계속되면서 농촌 저소득 계층을 위한 소득 안정 정책도 시급해졌음을 지적한다.
이에, 정부와 지자체도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농산물 가격 인상을 우려한 정부는 유통 업체와 협력하여 '농할(농, 축산물 할인) 캠페인'을 기획해 할인 행사를 하고 있다. 이 외에도 외식 할인 쿠폰 지급 등을 통해 소비 장려를 하겠다는 정책을 펴고 있다. 경기도는 코로나 19로 등교를 하지 못하게 되어, 더 이상 급식이 필요 없어진 상황에서 친환경 급식 지원 농가를 도와 소비자에게 꾸러미 형태로 판매하는 등 다양한 방식을 시도 중이다.
이런 상황을 두고 간혹 '다 장삿속'이라는 삐딱한 시선을 받으면 아직 단단해지지 못한 마음에 못이 박힌다. 하물며 나도 이럴진대, 실제로 상황이 힘든 농촌은 어떠할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사정을 조금이나마 아는 나는 부디 이런 정책이 잘 진행되어 농가에도 좋고, 소비자에게도 좋기를 바랄 뿐이다.
사실 이런 정책들은 이 상황을 '넘기는' 데에는 적합할지도 모르지만,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아닐 수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재해 피해 보상 등의 정책이 농업 밀착 정책이 가동되어 국가가 농업의 첫 번째 보호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정책이나 한시적 이벤트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생산자를 가까이 볼 기회가 많은 소비자로서, 이런 상황에서 개개인도 몇 가지 어렵지 않은 노력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첫 번째 노력은 그냥 '관심'이다. 평소에 농촌에 관한 기사를 지나치지 않고 단 한 번이라도 읽어보고 상황을 인지하는 것만이 모든 변화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가격이 비싼 이맘때에도, 그래도 우리 농산물을 이용하면 어떨까 싶다. 부디 이 기간만 이들을 먹어서 응원하면 일 년치 먹을거리를 담보하는 것과 같다. 특히, 이럴 때엔 낙과한 것이나 빗물에 수분을 잔뜩 머금어 밍밍한 과일이 쏟아지는데, 대량 사두어 청이나 콩포트를 담아 즐기는 것도 일 년 내내 맛있게 과일을 즐기는 방법일 테다. 참고로 나의 브런치엔 콩포트와 잼으로 위로를 건네는 방법에 대하여 그리고 자투리 채소를 활용하는 가장 좋은 음식인 샌드위치에 관한 이야기와 속을 꽉 채우는 팁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은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이다. 재해로 인한 농지 피해 관련 모금에 참여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속한 생협에 적지만 약간의 돈을 기부했다. 모든 기부가 그렇지만 되도록이면 쓰임이 확실한 곳을 찾으면 좋겠다.
비록 올해는 유독 고되고 힘든 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먹고사는 일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앞으로 더더욱 우리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 식탁을 찬찬히 살필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나원참, 이렇게 당하고 나서야 깨닫는 위대함이란. 오늘따라 더 보고 싶다. 우윳빛깔, 양상추!
우수수 떨어져 나동그라진 열매를 앞에 두고 망연자실해하며 하늘 앞에선 별도리가 없다던, 그래도 힘을 내보겠다는 어느 농부님이 생각나는 날입니다. 부디 비 피해 입은 모든 농가가 하루빨리 복구되길 바라봅니다.
오늘도 더 열심히, 그리고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단단해도 달달한 위로 한 입이 필요하다면,
저의 책 <식탁의 위로>를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