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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아 Jan 08. 2021

파독 광부, 이주 후의 삶에 대하여

두툼한 손. 아주 두껍고 힘이 느껴지는 손이었다. 얼굴도 나눈 대화도 희미해졌지만, 악수에서 느꼈던 묵직함은 그의 대표적 인상으로 남아있다.


 빡빡하고 버거운 출장길이었다. 일주일 새에 4개국을 돌아야 했고, 첫 번째 나라가 독일이었다. 하루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다음 날은 쾰른에서. 주목적은 한글학교 교사 연수 참관이었는데,  한인회장단, 총영사, 한글학교 교장단, 파독 간호사대표와의 간담회가 식사 때마다 계획되어 있었다. 더구나 나는 이사 수행의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보다 앞서 움직이고, 행동을 주시하며, 뒷수습을 하느라 꽤나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러니 사전에 없던 일정이 추가된 것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그가 나타난 것은 한글학교 교사 연수를 하는 장소였다. 원래 만나기로 했던 파독 간호사 대신 거구의 노신사가 인사를 했는데, 파독 광부라 했다. 그는 파독광부기념회관(에센한인문화회관) 수리와 지원의 필요성을 이런저런 서류를 보여주며 오래도록 늘어놓았다. 이미 회관 설립 때 기관에서 지원한 바가 있었기에 동일 건물에 대해 중복 지원이 어렵다는 답변이 이어졌지만 그의 호소는 계속됐다. 그러더니 그곳에 동행할 것을 요청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파독간호사회와 파독광부회는 같은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고, 파독간호사 대표와 협의하기로 한 내용이 그 건물에 관한 것이었기에 전혀 상관없는 만남은 아니었다. 그러나 연수장소에서 제법 거리가 되는 에센까지의 이동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몇 시간 뒤에 독일을 떠나야 했기에 조급하고 당황스러운 마음이었지만, 그는 본인의 차로 염려 없이 회관까지 그리고 공항까지 모실 테니 걱정 말라며 설득했다. 동행을 결심한 이사를 따라 결국 차에 올랐다. 그렇게 언짢은 마음으로 가게 된 파독광부기념회관은 (공식적으로라기보다 개인적으로)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방문이었다. 언제 또 그런 장소를 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건물 자체보다도 출장보고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파독 광부출신 어르신들과의 대화가 기억에 남았다. 출장 중엔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것이 (정확하게는 이사와 한인들의 대화를 듣고 기록하는 것이 내) 일이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서로 감사하고, 격려하고, 필요한 지원을 요청하는 말들의 다양한 변주였다. 하지만 동행하는 차 안에서, 시간이 없어 간단하게 끼니를 때운 중국 식당에서 우리는 그들의 삶을 들을 수 있었다.


영화나 각종 자료에서 보듯 파독 광부나 간호사의 고생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시체를 닦고 환자의 고름과 대소변을 치우는 일이나 빛도 공기도 희박한 땅 밑에서 석탄을 캐는 일 둘 중 무엇이 얼마나 더 낫고 편안했을까. 더구나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약소국에서 온 국민으로. 두 직업 모두 자국의 인력수급이 힘들어 외국 인력을 받은 것이었지만, 우리 사회에서 간호사와 광부의 사회적 지위가 다르듯 독일서도 마찬가지였다. 광산은 사양산업이었으나, 의료인력은 인류가 소멸되지 않는 한 꾸준히 필요했다. 광부는 경력이 쌓인들 지위가 오를 일이 없었지만, 간호사는 경력에 따라 대우가 달랐다. 현지인과의 결혼도 남성인 광부보다는 여성인 간호사가 용이했다. 연금도 간호사들의 사정이 나았다. 또한 대표의 말에 의하면 착실히 봉급을 모은 여성들과 달리 남성들은 고된 일을 끝내고 한탕 크게 돈을 써버리는 이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언제고 꽤 괜찮은 수입이 보장되리라 기대하는 사람처럼. 하여 광부들의 이후 삶은 훨씬 더 쪼들렸다.



그 설명으로 편견이 생긴 걸까. 회관에 도달해 만난 광부, 간호사출신 어르신의 차림이나 태도가 달라 보였다. 함께 여기저기 헐고 벗겨진 건물을 보여주면서도 어쩐지 새침하고 도도해 보이는 파독간호사대표와 달리 광부출신분들은 어깨도 움츠린듯하고 표정도 괜스레 자신이 없었다. 간호사대표는 또각또각 빠르게 와서 파독간호사들의 쓰는 사무실을 대강 쓱 뵈 주곤 어느새 사라졌지만, 두서너분이 맞이했던 광부출신분들은 느릿느릿 쇠락한 곳들을 가리키면서 이사를 올려다보았다. 그랬다. 키도 훨씬 크고 큰 덩치였는데도 나는 어쩐지 그들이 올려다보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묵직하여 듬직하게까지 느껴진 그의 손만은 옛시절의 힘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이질적으로 느껴졌고 조금 슬펐다.


그렇담 굳이 왜 그곳에서 살고 있나, 누가 거기 있으랬나 묻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번 이주를 해본 이는 알 것이다. 살던 터를 옮긴다는 게 여행처럼 쉽게 진행되지 않는단 걸. 그게 본국에서 외국으로의 이주든, 외국에서 본국으로의 귀환이든 마찬가지다. 한동안 뿌리박고 살다 보면 그새 늘어난 짐만큼이나 인연, 관계 혹은 가족들이 만들어지고, 학업이나 직업을 갑작스레 중단하기가 어렵다. 또 본국으로의 귀환이라고는 하지만 그간 단절되어 있던 사회에(한국 사회는 매우 빠르게 변하는 편이다) 다시 새로운 집, 일터, 관계를 생성해야 한다는 과제가 덜컥 두렵게 느껴진다. 또 다른 도전인 셈이다. 예전엔 지금보다 국가 간 이동이 어려웠고, 인간은 어쨌든 변화보다는 현상 유지를 편안해하니까 돌아간들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앞서면, 재이주에 따른 위험부담을 상쇄할 반드시 돌아가야만 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으면, 주저앉기를 선택하고 만다. 특별히 아주 큰 이득이 없을지라도 말이다.


만사가 그렇듯 현상유지가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므로 그들 중 어떤 이의 삶은 여전히 고단했다. 그 고단함의 정도는 멀리 생각할 것도 없이 노동인력으로 와서 한국에 정주하려는 외국인 노동자의 처지나 우리의 시선만 봐도 쉼게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정부가 간혹 격려하고 지원한 들, 도움이 필요한 이는 우리 사회에도 넘쳐난다는 이유로 그 손길은 말그대로 '간혹'일 따름이고, 어찌됐든 개인의 선택이 포함된 결과인 이상 더이상은 당위를 찾기가 어려울 게다.


고국을 떠난 후의 1세대의 삶을 잠시나마 들으며, 나 역시 마음만으로 다만 잘살기를 기원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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