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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아 Jan 13. 2021

제나, 사랑은 언제나 궁금하다

유학으로도, 워킹홀리데이로도, 이민으로도 많이 가는 나라 호주. 헤아려보니 지인들이 가장 많이 머물렀거나 머물고 있는 나라인데 나에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들르게 된 이유도, 뉴질랜드 간 김에, 항공편 경유하면 싸니까, 경유하면서도 최단거리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케언즈는, 호주에 대한 정보는 그래 봐야 시드니, 멜버른 정도기에, 낯선 도시였다.


케언즈는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로 유명하다. '세계에서 최대 산호초 지대로, 400종의 산호초와 1,500종의 어류, 4,000종의 연체동물이 살고 있다'는 그 일대는 지나는 김에 왔다고 하기엔 정말 아름답고 대단한 장소였다. 망망대해 아래 그런 장면이 있을 줄이야! 그 산호초와 바다 밑 생물을 보기 위해 산소통 없이 스노클링 마스크만 쓰고 내려갔어도, '우와 살다 보니 이런 장소가 있다니' 하는 감탄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정작 케언즈 시내는 좀 썰렁하다. 따로 투어를 신청해야 하는 산호초 구경은 하루짜리였고, 인공 수영장인 라군을 잘 조성해놓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외엔 볼거리가 많지 않아 일찌감치 숙소에 들어가곤 했다. 더 찾자면 다른 투어나 체험도 있긴 했지만, 석 달 간의 여행 끝이라 좀 쉬고 싶었다. 


그때 묵었던 숙소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로, 다른 방 하나는 이십대로 보이는 중국계 커플이 사용했다. 여자는 일을 하는 모양이고, 남자는 학생이었다. 나는 숙소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면서, 레스토랑서 사 먹기는 부담되니 마트에서라도 최상급 안심을 사다 실컷 먹어야겠다며 날마다 스테이크를 구웠다. 그런 내가 집주인 제나는 궁금했던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테이블을 정리하는데 제나가 차를 마시지 않겠냐 물었다. 심심하던 차에 나로서는 환영. 그는 내게 어디 어디 다녀왔냐, 얼마나 여행하냐, 어느 나라 사람이냐 등 가벼운 질문들을 물은 후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편지 꾸러미를 들고 왔다. 한국에서 유학한 적이 있다는 남자 친구에게 간혹 온다는 편지였다. 남자 친구는 그저 친구라고 하는데, 꾸준히 오는 이 편지의 내용이 궁금하다는 제나의 얼굴은 복잡한 마음을 담고 있었다. 정말 친구였으면 하는 바람, 그럼에도 수상쩍은 느낌, 진실이 무엇인지 꼭 확인하고 싶은 답답함, 낯선 여행객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데에 대한 부끄러움과 남자 친구가 없을 때 해결해야 하는 조급함까지.


찬찬히 한글로 쓰인 편지를 읽었다. 분홍 편지지에 꾹꾹 눌러쓴 글씨체가 귀여웠다. 이 편지의 발신인은 이런 식으로 편지가 읽힐지 알았을까? 몰래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기분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났다. 편지의 내용은 단순했다. 한국을 떠난 지 벌써 얼마가 지났는데, 잘 지내는지. 같이 공부하고 웃었던 기억이 선하다는 내용과 함께 그때 누구랑 누구랑 무슨 일이 있었는데 우리 참 재밌지 않았느냐고 질문이라기보다 회상에 가까운 물음도 있었다. 그리고 널 계속 기억하고 있다고, 앞으로도 잘 지내길 바란다는 당부로 끝났다.


나는 담백하게 편지 내용을 번역해 주었다. 내용을 들은 제나는 둘 사이가 어떤 것 같으냐 조급한 말투로 재차 물었다. 잠시 고민했지만, 친구가 맞는 것 같다고 답해주었다. 실제로 둘 사이는 연인으로 보이진 않았다. 다만 편지를 쓴 이의 마음이 제나의 남자 친구에게 향하고 있음은 전해졌다. 중간중간의 말 줌임표나 '우리'와 '나'라는 주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상대방의 마음을 떠보는듯한 문장들이. 조심스러웠지만 애가 탔다. 내가 이런 편지를 받았다면, 그리고 상대에게 나도 마음이 있었다면, 무척 설렜을 것 같았다. 그것이 글쓴이의 일방적인 마음인지, 아니면 실제로 '이 감정은 과연 뭐였을까' 여운이 남는 감정이 서로 간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너도 나 기억하니? 우리 좋았는데...'라고 의중을 살피는,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해도 고백으로 돌아올 것 같은 이 편지에 남자는 답장을 했었을까.  


나는 행간에 숨은 마음을 너무 알 것 같은 낯 모르는 여성, 호주에서 남자 친구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보다 더 많이 남자 친구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 그리고 조금 괘씸한 마음이 드는 한 남성 사이에서 누구 곁에 서야 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내 앞에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이를 안심시켜주기로 했다. 내가 읽은 감정을 말줄임표 안에 넣어버렸다. 둘 사이에 썸이 있었다고 한들, 이 남자는 한국에 사는 여성에게 달려갈 것으로 보이지 않았으므로.


"걱정 말아요. 아무 사이도 아닌 것 같아요."

그 말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한 순간이라도 제나는 편안해 보였다. 나는 한결 더 친숙해진 숙소에서 호주에서의 마지막을 즐겁게 보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며 문득 궁금해진 제나의 소식을 찾아보았다. 3년이 지난 지금, 제나와 남자 친구는 (이젠 배우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함께 숙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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