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흔한이름 May 24. 2023

“엄마! 첫 번째로 나 사랑 안 하면 안 돼? “

딸이 깨우쳐준 나의 황금가면

자기 전에 이불을 펴면서 장난을 치다가 내가 물었다.

“우주야, 엄마가 세상에서 쩨~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응! 당연히 알지! 우주! 우주잖아!”

“맞아~ ”

“근데 엄마, 첫 번째로 나 사랑 안 하면 안 돼?”


갑작스러운 전개였다. 늘 우리가 하던 놀이에, 습관처럼 하던 말이었기에 답도 정해져 있었다. 나는 우주를 제일 사랑하고, 우주도 당연히 엄마를 가장 사랑하는 뭐 그런.. 그런데 그게 아니라 좀 의아했다.


“왜? 그럼 누구 해? “

“엄마!”

“어?????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아~ 자기를 쩰 사랑하는 건 좋은 거랬어. “


7살 어린이집에 다닐 때 자존감을 높이는 수업이 있었다. 대단한 건 아니고 ‘나는 내가 정말 좋다. 밝게 웃는 내가 좋다.. 노력하는 내가 좋다..‘ 뭐 이렇게 구호를 외치고 발표도 하며 노는 시간이었다. 솔직히 나는 그 구호들이 약간 오글거렸고 너무 어른 같은 수업이라 굳이 저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다. 그런데 영상통화를 하며 구호를 외치는 우주를 보던 언니가 ’ 우주야 이모가 너무 힘이 난다 ‘며 눈물을 글썽이는 게 아닌가. 그때 나는 우리 언니에게 갱년기가 찾아와서 그렇구나 생각했다.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아기 때부터 우주에게 주문을 외듯이 했던 말이 ‘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해’였다. 육아를 글로 배우던 시절 육아책에서도 전문가들도 이 말을 해주면 아이에게 좋다고 하길래, 시작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입이 안 떨어졌다. 눈으로만 보던 말을 육성으로 하자니 아이와 나 둘 뿐인데도 괜히 수줍었다.


그런데 신기한 게 한 번 말하기 시작하니까 두 번, 세 번.. 그다음은 자동이 되었고, 원래도 소중했던 나의 아이가 더욱더 소중하게 다가왔다. 또 모든 순간, 어떤 상황에서도 이렇게 좋은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혼을 낼 일이 있어서 한참을 이야기한 후에도, 장한 일을 해서 칭찬을 해줄 때도, 무언가 서러워서 엉엉 울 때도, 귀여운 옷을 입고 방그르르르 돌 때도 맨 마지막에 ‘너는 가장 소중하다’로 끝이 났다. 그런 일들이 영향이 있었던 걸까.


“엄마, 나는 우주가 제일 좋아. 엄마도 빵순위로 사랑하는 사람.. 엄마 하면 안 돼? “


이 말을 들으니 자존감이 높은 아이로 자란 것이 대견하면서 그제야 ‘나는 내가 좋다’고 외치던 7살 우주의 모습에 눈물을 글썽이던 언니의 마음이 조금 이해가 됐다.


나도 내가 가장 소중했던 때가 있었다. 결혼을 하기 전에,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학교에 다니고 회사에 다니면서 정말 망나니처럼 자유롭게 살던 시절에 세상의 중심은 나였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먹고 싶은 것도 많았고,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는 꿈도 있었던 것 같다. 대학 때는 조금 안정된 일을 하고 싶었다. 공부도 더 하고 싶어서 대학원에도 가봤고, 막상 가보니 공부는 내 길이 아니구나 싶어서 얼른 직장을 구했다. 형편이 허락하는 한, 가고 싶은 길은 끝까지 가보았고 아니다 싶으면 주저하지 않고 돌아섰다.


많이는 아니지만 혼자서 여행도 다녔다. 처음 혼자서 떠난 여행에서 겨우겨우 호텔에 도착한 뒤 침대에 벌러덩 누워서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서 여기까지 왔을까’ 생각했던 게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때는 그게 낭만이었고 멋이었다. 진짜 한 번이 어렵지 그다음은 시간만 생기면 나설 궁리를 했었다.


새로운 일자리도 마찬가지였다. 가고 싶었던 곳에 자리가 나면 내 실력이 되든 안 되든 도전했고, 거기에서 고생, 고오오오생을 하면서도 버텨냈다.


결혼도 그런 줄 알았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에 가듯이 자연스럽게 지금쯤이면 때가 됐다고 생각했고, 나는 어디에 가서든지 다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장거리 연애 끝에  대한민국에서 사주를 좀 본다는 분들이 모두 말리는 결혼을 감행했고,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왔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제일 소중했던’ 내가, 다음 순위로 밀려난 것이 말이다.  임신 7개월 차에 내려온 지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출산을 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경력단절여성’이 되었고, 친구도 하나 없는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지방에서 제일 불편했던 것은 대중교통이었다. 언제든, 어디로든 나를 데려다주던 버스와 지하철이 없었고, 낯선 곳의 골목골목을 찾아가려면 큰 맘을 먹고 택시를 타거나 남편이 쉬는 날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가자고 해야 했다. 생활반경은 더 좁아졌고 하루종일 아이와 둘이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은 길어졌다.


뭐라도 배워보려고 해 봤지만 주변에 그런 시설도 없었고, 아이도 너무 어렸다. 아이가 목을 가누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아기띠를 둘러메고 카페에 가고, 마트에서 장도 보고, 문화센터에도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가기 시작했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아이와 나는 한 몸처럼 움직였고 그러다 보니 아이는 어느새 내가 가장 의지하고 믿는,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아이가 10개월이 될 무렵, 친구가 보내준 구인공고를 보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이를 재워놓고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원서를 썼고 자기소개서와 직무계획서를 고치고 또 고쳤다. 서류가 된 다음에는 슈퍼 ‘E'였던 내가 손을 덜덜 떨 정도로 긴장을 하면서 면접시험을 보았다.


면접을 보는 날은 엄마와 언니가 회사까지 아이를 데려와서 내가 시험을 보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런데 그날 나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는 우리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말로는 “안 된다고 해도 실망하지 마”라고 해놓고 엄마는 내가 대학에 갈 때보다 더 초조한 모습으로 손녀를 둘러업고 왔다 갔다 했다. 서울에서 혼자 살던 딸이 지방으로 내려온다고 했을 때 ‘다시 생각해 보라’ 던 엄마의 한마디가 얼마나 고르고 골라서 꺼낸 말이었는지 그 모습을 보니 헤아려졌다.


무민랜드제주에서 얻은 말.

그 간절한 마음 덕분에 나는 재취업을 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 워킹맘‘이 되었다. 갑작스레 어린이집에 가게 된 아이에 대한 미안함에  퇴근 후 집에 돌아가서도 나보다는 아이에게 더욱 집중했던 것 같다. 당시는 30대였고 나름 젊었기에 체력도 지금보다는 좋았다.


그렇게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외치던 시절에서, 아이가 소중해지는 시절로 자연스럽게 이동했다. 직장에 적응하고 이제 조금 살만하다 싶을 때 다시 둘째가 찾아왔고, 여전히 첫째, 둘째 아이에 집중하느라 나를 돌볼 틈이 없었다.. 체력적으로나 뭘로 보나 다른 걸 할 수도 없었다.


다행인 것은 이런 나와는 달리 우주는 스트레스라고는 전혀 없는 얼굴로 ’ 나는 나니깐!(까, 말고 깐이라고 해야 말맛이 산다)‘ 이라며 춤도 추고 재롱도 부린다. 조금만 뭘 잘했다고 하면 ’역시 나는 천재야!‘라는 말과 함께. 그런 내 가장 친한 친구가 ’ 엄마‘를 소중하게 여기라니 한편으로 기특하면서도 내가 어떻게 살고 있나, 지금 어떤 모습인가를 돌아보게 되었다.


퇴근하고 돌아와서는 일단 잠시라도 누워야 식사준비를 할 수 있고, 둘째가 잠시 잠이 들면 ‘엄마 5분만 쉴게!’하고 눕는다. 우주 기준으로 예쁜 옷도 안 입고, 화장도 잘 안 하고, 남편이 없는 날은 아이밥만 대충 챙겨주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한다. 배달음식을 시킬 때도, 내가 먹고 싶은 것보다는 가족 모두가 먹을 수 있는 메뉴를 고른다. 내가 먹고 싶은 게 무슨 대순가 한 끼 편하게 때우는 게 장땡이지.


숙제 하나만 차분히 봐주기가 어려워 이 일 저 일 하면서 “빨리 하자, 빨리빨리!”라는 말만 반복하고 고작 9살인 아이에게 “엄마 오늘 힘드니까 조금만 도와주라.” 부탁을 하고 또 한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너를 제일 사랑해, 너는 세상에서 제일 소중해!”라고 말하고 있으니... 어쩌면 아이입장에서는 조금 헷갈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를 소중히 생각하고, 나를 가장 사랑하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엄마’를 빼고 난 다음에 나한테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꼭 하고 싶은 일은 아니지만 적당히 찾아 들어간 회사. 일의 보람보다는 ‘입금’ 자체에만 집중하니까, 시간이 너무 더디고 더 쉽게 지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살고 싶은 대로 살기에는 그럴 용기도 없고, 마흔셋이라는 나이도 목에 탁 걸린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더 집중하고 내 인생을 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가 시킨 일이 아니었으니 결국 나의 선택들이 모여 오늘을 이루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선택에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가게 됐다. 단순히 ‘행복하다’, ‘불행하다’ 이렇게 딱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다. 비포장길을 달리는 버스처럼 덜컹거리며 오늘은 이쪽으로 쏠리고 내일은 또 저쪽으로 쏠린다.


요즘 퇴근할 때 동률님의 새 노래 ‘황금가면’을 반복해서 듣는데, 노래 가사와 우주가 한 이야기가 묘하게 겹쳐진다.


“세상이 정해준 내 역할이 마음에 안 들어… 이렇게 맥없이 쓰러져 갈 하찮은 내가 아니지...” *

                                              (*김동률, <황금가면> 가사)


‘그래 하찮고 시시한 내가 아닌데,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생각하다가 다 생각을 하기 전에 집에 도착해 버린다. 그러면 나는 숨을 고르고 또 하던 대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아이를 안은 뒤 잠시 눕는다. “엄마 딱 5분만 쉴게!” 하면서.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회사 끊으면 안 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