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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이름 Jun 05. 2023

“엄마는 몇 살까지 살 거야?”

아이의 곁에서 가장 오래오래 사는 방법

“왜 할머니는 안 계셔?”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을 줄 알았다. 할아버지댁에 가면 할머니가 안 계시고, 외가에 가면 외할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의아하게 생각할 날이 오겠거니 했다.


“할머니는 아빠랑 엄마랑 결혼하고 얼마 뒤에 돌아가셨어.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먼저 가신 거야.”

“그럼 외할아버지도?”

“응..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어릴 때 하늘나라에 가셨어.”

“아.. 그래.. 엄마 많이 슬펐겠다..”

 

그러게.. 많이 슬펐던 것 같다. 내가 딱 지금 우주 나이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2학년 늦가을, 제법 날씨가 추워질 무렵이었다. 장례식을 치르고 얼마 뒤였나. 학교를 마치고 운동장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벤치에서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옆으로 누웠는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떡볶이 단추가 달린 빨간 코드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있었던 나는 손을 꺼내 눈물을 닦지 않고 그냥 두었던 것 같다. 이상하게도 가끔 웃다가 갑자기 울적해질 때가 있는데 그때는 어김없이 이 모습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집에서는 누구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으므로 나는 누구보다 밝고 씩씩하게 자랐고, 사춘기도 큰 방황도 없이 ‘엄마에게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스무 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었다.


형제자매들 중에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짧게 받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짧았지만 강렬했고 모자란 사랑은 엄마와 언니, 오빠가 채워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엄마 생각은 달랐나 보다. 내가 결혼할 사람을 데려왔을 때부터 무겁게 꺼낸 말이 ‘얘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외로움이 많이 타니까 더 잘해주라’였다. 막상 아홉 살인 우주를 보니 ‘아니 이렇게 아기였다고?‘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엄마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여전히 내 눈에 아기처럼 보이는 우주는, 이제 누군가의 빈자리가 보이고 다른 사람의 슬픔도 알게 됐다. 또, 사랑하는 사람의 사라짐에 대해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은 다름 아닌 ’ 엄마‘였다.


어느 날은 불쑥 “엄마도 깨꾸닥 해?”하고 묻길래 “그럼~ 엄마도 깨꾸닥하지~ 나이가 들면 누구나 다 하늘나라에 가는 거야”라고 말해줬다. ‘깨꾸닥’은 죽는다는 우주의 표현이었다. 그랬더니 “내가 20살 되면 엄마는 몇 살이야?” “30살 되면? 40살 되면? 이걸 무한 반복했다. 또 어떤 날은 이렇게 물었다.


“엄마는 몇 살까지 살 거야?”


“어? 글쎄.. 엄마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몇 살까지 살면 좋겠어? “

“백 살? 이백살? 삼백살?”

“한.. 백 살까지 살까? 근데, 할머니 되면 우주가 엄마 돌봐줘야 돼. 밥도 챙겨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할 수 있겠어? “

“응! 된장찌개 끓여줄게!”


살면서 단 한 번도 몇 살까지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이가 자라는 하루하루는 세어보면서도 내가 늙고 있는 날들은 헤아리지 않으니까. 그냥 나는 그대로고 아이만 큰다고 여겼다.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진짜 그런 것 같다. 여전히 뭐든 다 할 수 있고, 더 열정적으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회사에서 한 칸씩 뒤로 가며 소외될 때, 사회에서 세는 청년기준을 넘어섰을 때는 괜히 울적해지곤 했다. 아무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나는 몇 살까지 살아야 할까?
엄마로서는 얼마까지 살아주는 게 좋을까?


자연의 섭리이고 신의 영역이겠지만 우주의 말을 듣고 생각을 해보았다. 결혼 전에는 솔직히 삶이 버겁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생기고 꼬물꼬물 자라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버거움 곁에 ‘포기’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게 됐다.


그 배경은 책임감이었다. 아이에게 물어보지 않고 우리 마음대로 세상에 내놓았으니 힘이 닿는 한 길게 머물러 주고 싶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건강하고, 내 노후도 잘 준비를 해 놓고 싶은 것이 나의 새로운 장래희망이다.


결혼 8일째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위중하셨기에 생존해 계실 때 아들 결혼식을 보셨으면 하는 마음에 우리는 식을 서둘렀고 신혼여행을 미뤘다. (이 이야기도 길지만 다음에 하기로 하고.. )


시어머니의 빈자리가 나에게도 굉장히 컸다. 특히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커갈 때, 집안 대소사를 우리 힘으로 치러내야 했을 때, 남편이 엄마의 손맛을 그리워할 때, 아버님이 편찮으셨을 때….. 정말 수도 없다. 내가 이런데 남편은 오죽할까.


반대로 나는 아이들 곁에 있는 남편과 시아버지를 보며 내 아버지의 부재를 다시 생각했다. 시어머니의 장례식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는데, 장지에서 딸과 며느리가 비를 맞을까 봐 그 와중에 천막을 먼저 쳐주셨던 분이 우리 시아버지셨다.


내가 계약직으로 취업했다고 말씀을 드렸을 때는 “아이고~ 그러면 눈치 보여서 어쩌냐. 힘들면 언제든지 그만두고 오너라” 말씀해 주신 분이다. 따스한 말 덕분에 회사에서 치사한 일을 겪을 때마다 든든했다.


남편은 나에게는 자주 미운 사람이지만 아이 소풍에 함께 가고, 녹색어머니회에 가서 교통봉사를 하고, 자전거도 같이 타며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아버지가 계셨다면 얼마나 다정하고 힘이 되었을까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다 힌트를 얻은 것은 나의 엄마와 보낼 때였다. 재작년인가. 우주의 어린이집 방학에 맞춰 여름휴가를 내고 엄마에게 가서 며칠 보내다 온 적이 있다. 우리는 엄마가 꺾어서 삶아주는 옥수수를 먹고 시골집 마당에서 삼겹살도 구워 먹었다. 엄마는 귀찮아하면서도 굉장히 좋아하셨다. 그 시간을 보내고 난 뒤 나는, 우주가 이만큼 자라났을 때 나와 여름휴가를 보낸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다.


‘오늘의커피’로 세줄일기에 남겨둔 기록.


‘사춘기가 되면, 고등학생이 되면, 대학에 가면, 혹시 재수를 하게 되면? 친구들끼리 여행을 간다고 하면? 남자친구가 생긴다면? 맥주를 같이 마시게 된다면? 결혼을 한다면 혹은 하지 않는다면? 아이를 낳게 된다면?’


아이가 자라서 만나게 될 모든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나의 곁을 지켜주었던 우리 엄마를 떠올려 보니 '만약에'라는 단서를 달더라도 우주가 맞이할 그 여러 상황에서 내가 사라진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결코 쉽지는 않다. 행복하고 뭉클한 순간만큼 짜증이 나고 화가 나고 '나는 어디로 갔을까'를 생각하는 시간도 많다. 하지만 소리를 치고, 울고, 화를 내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더라도 나는 아이 곁에서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가장 힘들고도 어려운 꿈을 꾼다.


그렇게 되려면 얼마나 많은 덕을 쌓아야 할까? 내 아이에게도, 세상에게도 더없이 친절하고 잘해야겠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스트레스를 받아서 일찍 깨꾸닥할 것 같다ㅠㅠ 그래서 나는 ‘덕’을 쌓기보다 아이와 추억을 더 많이 쌓기로 했다. 그래야 언젠가 내가 떠나더라도 아이의 추억 속에서 진짜 오래오래 머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루하루 소소한 일을 함께하고 기록하고 서로의 일을 더 많이 이야기하며 우리는 오늘 하루도 각자의 나이를 채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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