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아미타불
(월간원광 2023년 2월호 기고문)
법당 가는 길. 새날 첫 걸음을 뗀다. 달 밝은 새벽. 도량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두꺼비 한 마리에 한눈 판 찰라, 바스라지는 소리에 놀라 발밑을 살핀다. 달팽이를 밟았다. 나직이 ‘나무아미타불’ 읊조리며 가던 길을 마저 재촉했다.
아침공양을 마칠 즈음 햇살 들이치는 창문 너머로 라오스 고깔모자 ‘꿉’을 쓴 두 아낙이 작대기로 소 떼를 몰며 교당 곁을 지난다. 바람에 실린 워낭소리가 풍경소리를 닮아 고즈넉한 정취를 자아낸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신선한 풀을 찾아 걷고 또 걷는다. 그러다가 차가오나마나 아랑곳없이 도로에 배를 깔고 아스팔트가 머금고 있는 햇볕의 온기를 한가로이 만끽하다 무더우면 웅덩이에서 목을 축이고 소나기가 내리면 거목 그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든다.
들판의 거친 풀을 먹이 삼아 살아가는 라오스의 소들은 작고 마른데다 근육이 두껍고 질겨, 인간의 입맛에 맞게 길러져 부드러운 살점과 안개꽃 마블링을 갖고 있는 한국소들보다 도축장에서 낮은 등급을 받겠으나 이는 사람의 기준일 뿐. 굴레 없는 자유는 라오스 소들의 복이다.
때때로 목줄 없는 동네 개들이 힘차게 내달려 송아지를 장난삼아 놀래키면 어느새 어미 소가 나타나 뿔을 앞세워 개들을 쫓는다. 암캐와 수캐는 여기저기서 흘레붙고 호기심 많은 강아지들은 생기 발랄하다.
배고픈 개가 쓰레기통을 엎고 굶주린 고양이가 쓰레기봉투를 찢는다. 닭이 소똥을 헤집어 벌레를 쫀 덕분에 소똥이 오래 쌓일 일 없이 흙으로 돌아간다. 라오스의 닭들은 날씬하고 날랜데다 싸움꾼 기질이 남달라 개들이 감히 건드리지 못한다.
물소는 가까이 가기 두려울 정도로 우람하다. 힘과 고집이 세서인지 코뚜레를 찬 그네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목동 없이 자유로이 거니는 말 떼와 마주치기도 한다. 옆 집 오리와 이웃집 돼지들이 헐거워진 울타리 틈으로 들어와 낮게 잘린 마당 풀밭에 머리를 박고 부지런히 허기를 채운다.
대지 위에서 사람과 동물이 스스럼없이 섞여 산다. 해가 뜨면 이집 저집 가축들이 제 집에서 나와 천지가 내 집 인양 노닐다가 해질녘에 길을 따라 자기 집에 스스로 깃든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하나 둘 명을 다하고 또 다시 새 몸으로 제자리에 올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중생은 언제가 닭이었고 언젠가 오리였고 언젠가 돼지였고 언젠가 소였고 지금은 사람이다. 모두가 하나로 서로의 부모였고 형제였다. 그러니 어찌 미물이라 하여 불공하지 않겠는가. 어찌 더불어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지 잊었을 뿐이다. 다만 모르기 때문이다.
이생에 부처님의 제자 된 몸으로 착 없이 가고 착 없이 행하다 마침내 윤회에서 벗어나는 그 날, 한량없는 자비를 온 누리에 회향하리라는 서원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