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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영등 Jan 19. 2023

꽃이 피네

꽃이 피네     


월말 실적을 마감한 날 저녁. 안 그래도 불경기에 시달려 짓눌린 월급쟁이들의 어깨가 더 축 쳐졌다. 김 부장은 김 과장을 불러 보도방 제동이에게 전화를 넣어서 아가씨들을 업소에 대기시키라고 했다.  

   

“자! 우리 한 잔 하러 가자!” 


김 부장의 호령에 못 이긴 나와 동료들은 석양이 진 인도 위에 지친 발걸음을 옮겼다. ‘파타야’라는 네온사인 간판이 번쩍이는 유흥업소 계단을 올라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배정된 룸 문을 열었다.      


술과 가지가지 안주 그리고 제동이가 데려온 작부들이 차례로 들어왔다. 제각기 고른 사람을 곁에 두고 술잔을 서로 기울이며 실없는 농을 주고받았다. 긴 소파 구석에 앉은 나는 이 낯선 분위기에 당황해 말을 잃었다.     

붙어 앉은 색시가 자기는 술을 안 마셔도 되냐길래 그러라고 했다. 다른 방에서 이미 양껏 먹었다는 그녀에게 억지 술을 권하고 싶지 않았다. 몹시 피곤한지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대더니 그새 잠들었다.     


다들 취기로 달아올랐을 무렵 김 부장이 갑자기 가운데 놓인 큰 테이블에 벌떡 올라섰다. 그러고선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들더니 만 원짜리를 한 움큼 쥐어 팔을 쭉 뻗어 크게 반원을 그리며 허공에 돈다발을 날렸다.


어둠 속 싸이키조명 아래 하늘하늘 돈이 나리는데 벌거숭이 여인들은 나부끼는 지폐를 잡겠다고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 엉켰다. 김 부장은 술상 위에서 의기양양하게 이 광경을 내려다보며 직원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순간만은 너희들이 왕이다! 신나게 즐기며 스트레스를 풀어라!”        


이어진 가무로 흥이 더욱 고조되었으나 만취한 나의 몸과 마음은 산산이 부서져 나락으로 치달았다. ‘내 눈 앞의 이 군상들은 누구이며 나는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가. 나는 어째야 하나.’ 허나 나에겐 그 자리를 떨치고 나갈 배짱도 없을 뿐더러 그 분위기에 하나가 되지도 못했다. 자포자기의 심경으로 연거푸 술만 들이켰다.  

   

이때 춤추며 노래하던 여자가 핸드폰으로 그 장면을 찍는 직장선배를 보고 화들짝 놀라 손을 내 저으며 촬영하지 말라고 외쳤다. 이내 덩치 큰 남자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그를 제지했다. 


그렇게 한차례 소동이 잦아들고 얼마 안 지나 주어진 환락의 시간이 다 되었다. 옷과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나설 즈음 옆 좌석 여급이 무슨 이유인지 내게 명함을 달라며 손을 내 밀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붉푸른 불빛 아래 나풀거리던 욕망, 돈을 주우려고 허리 숙여 바닥을 더듬던 이들의 아우성, 그들을 내려다보던 김 부장의 거만한 비웃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한 나, 이 모두를 마냥 다 지우고 싶었다.     


하지만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며 나를 괴롭히던 그날의 슬픔과 분노, 좌절, 연민은 섣불리 뽑으려다 더 박히는 가시처럼 잊으려 할수록 더 깊이 나를 파고들었다. 이후 샐러리맨 생활을 뛰쳐나가 방황하던 시절에도 그 야밤의 악몽은 오래도록 강렬히 남았다.     


몇 년 방랑의 길 끝에서 구도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내가 찾은 그 길은 산 속에 숨어 속세를 피하거나 외면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저잣거리의 희로애락과 시비이해를 맞닥뜨리며 참된 삶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치열하게 나아가는 도리이니 지난밤의 아픔은 살아있는 화두가 되어 지금을 살아가는 나를 때때로 일깨워주고 있다.     


빛나는 햇살아래서도 누군가의 얼굴에 드리워진 생의 그늘을 망각하지 아니하고 비에 젖어 스산한 그대에게 우산을 건네는 손길은 그 밤의 내가 오늘의 내게 준 유산이다. 절망에 빠진 나에서 부처님 제자로 돈 꽃은 하늘 꽃이 되었다.     


꽃이 피네 꽃이 하늘 꽃이 피네

여기 저기 하늘 꽃 하늘 땅 가득하니

개벽이 되리 개벽이 되리 참 개벽이 되리다.

원불교 성가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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