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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영등 Mar 16. 2023

모르는 게 약

모르는 게 약     

(월간원광 4월호 기고문)


“저는 대학행정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걸요. 경력도 없고요. 그런 저에게 왜 라오스 삼동백천기술직업학교 행을 권하시나요? 원광대학교나 원광고등학교에서 잔뼈가 굵은 교무님이 저보다 낫지 않을까요?”   

  

“백 교무가 적임자인 이유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야.”     


문외한인 까닭에 적격이라니 아리송했다. 구룡상사원에서 물러나 지리산 거처로 돌아오는 내내 시무실장님이 남긴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교보문고에서 “교육행정 및 학교경영의 이해”이라는 책을 주문했다.     


2021년 5월 15일 밤에 라오스 시엥쾅주 폰사반에 도착했다. 학교설립허가증에 붙은 인지 영수증에 적힌 날짜가 4월 30일이다. 완공된 지 얼마 안 된 건물이 번듯했을 뿐 교수도 학생도 사무용품도 기숙사 옷장마저도 없었다. 그밖에 갖춰야 할 것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른 결혼이 빈번하고 대학진학률이 높지 않은 현실에 폰사반이라는 소도시에서 박사, 석사학위 소지자는 고사하고 학사학위를 가진 교원을 모시는 일도 만만찮았다. 게다가 교사임금이 다른 직종에 비해 나을 게 없으니 유능한 젊은이들은 대도시의 사기업에 취업하려 한다. 상황을 보다 못한 이사장님께서 동네 카센터를 돌며 자동차정비학과 선생을 수소문했다.     


교직원이 얼추 꾸려지고 나니 이제는 근로계약을 맺어야했다. 수도 위양짠 소재 로펌에서 받은 예시가 있었지만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라오스 근로기준법과 사회보장법을 보며 일일이 대조해 라오어와 한국어가 병기된 근로계약서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지인 부학장은 이전 근무지에서 사용했던 고용계약서 양식을 고수했기에 협의를 통해 합의해야했다.     


임금과 등록금 그리고 장학금을 정하는데 있어서도 인근 사립대학 연봉 및 학비를 면밀히 조사하고 또 라오스 경제상황을 살펴야했다. 언어장벽에다 맺어둔 인맥도 없었던 터라 곳곳에 어려움이 도사렸다. 오래 와 계신 원로교무님의 견해를 받들고 현지직원들의 의견을 경청하며 하나하나 결정해야했다.     


청소도구를 비롯한 사무집기를 살 때.  커미션을 줄 테니 가격을 올리자고 통역직원을 꼬드긴 상점 주인에게 분노하기 보다는 귓돈을 제안 받았다는 솔직한 고백을 한 그녀에게 감사해야했다. 내 상식에는 불합리한 관습이지만 그들에게는 아직 당연하다.     


디딤돌이 되기는커녕 걸림돌이 되기 일쑤이기에 한국과 미국에서 얻은 경험을 내려놓아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에서는 이미 사라졌지만 라오인의 삶 곳곳에 보이는 낡은 풍습을 비웃을 이유가 있을까? 구한말 제국주의 선진국에서 온 유럽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조선인들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내가 만약 교육계에서 단련된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내 잣대로 라오직원들을 다루려했다면 득보다 실이 많았을 터이다. 이방인으로서 거주국의 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겸손과 정성, 마음에 밴 선입견을 내려놓는 용기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는 태도와 배우자는 노력이 절실하다.      


관념과 상(相)을 놓는 부처님 말씀이 삶에 피어나지 아니하고서는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없다. 빈 마음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일이 없다.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한 시라도 잊지 말아야 할 본래 모습이다.     

 

무릇천하 만사가 다 본말(本末)과 주종(主從)이 있나니근본을 알아서 근본에 힘쓰면 끝도 자연히 좋아질 것이나끝을 따라 끝에만 힘쓰면 근본은 자연 매하여질 것이요또한 를 알아서 에 힘쓰면 도 자연히 좋아질 것이나을 따라 에만 힘쓰면 가 자연 매하여질 것이니... - 원불교 대종경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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