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흔적 134
3월 17일, 여전히 무덥고 무더운 후아힌. 가끔 나약해지는 그런 때인가 보다.
운동선수인 반달이의 훈련을 위해 같이 한국을 떠난 지도 거의 3개월이 되어간다. 잠시 한국에 머무른 2주를 제외하고 거의 3개월째 우린 타국 생활 중이다. 때로 방랑벽이 돋아 여행을 떠나고 가끔은 2주 이상 타국에 머물러 봤기 때문에 타국 생활을 걱정하진 않았는데, 왜인걸...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여행으로 떠나는 2주와 생활을 위한 3개월은 정말 큰 차이였다.
멋모르고 떠난 첫 두 달간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훈련을 따라가서 같이 봐주고 같이 걸어 다니며 그의 운동을 같이 분석해줘야 했다. 또한 시합이 다가올수록 예민해지는 그의 감정을 눌러주고 부드럽게 풀어주는 것 또한 나의 몫이었다. 그의 훈련을 따라가지 않을 때는 빨래를 하고 돌아와서 먹을 식사를 챙겼다. 나를 중심으로만 돌아가던 내 세상이 그의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 세상은 나만이 있었다. 내가 주체였고 내가 제일 소중했고, 나의 의지로만 움직였다. 하지만 그와 같이 있는 시간들 속에서 중심은 그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내 감정이 어떤 형태인지 인지할 수 없었다. 그가 훈련에 매진할 수 있게 도우러 나오는 것을 선택한 것은 나였기에, 부정적인 감정이 끼어들어도 인지하지 못했다.
점차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시간들 속에서 나는 천천히 무너졌다.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그저 멍하니 밖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움직여야 하는 집안일을 마치고 나면 다시 멍하니 있었다. 훈련에서 돌아온 그도 피로가 쌓였기 때문에 나를 세심하게 챙기는 것을 힘들어했다. 그렇게 각자 같은 목표를 향해 손잡고 걸어가기로 했지만, 서로를 보지 않고 목표를 향하는 목적만이 남았다.
우리 둘 다 다른 사람에게 내 속마음을 터놓는 것도 솔직하게 내 감정을 돌아보는 것도 어려워하는 편이기에 스스로가 어떤 상태인지 몰랐다. 나는 내 마음이 병들어 곪고 나서야 알았다. 마음에 곰팡이가 핀 것처럼 어두워져서 햇빛이 들지 않아 검게 변한 감정이 튀어나오고 나서야 나는 내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말했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물론 그게 내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나는 왜 지금 이곳에 그의 옆에 있는지, 내 존재가치가 그저 이런 보조적인 것 때문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난 스스로가 점점 투명해진다고 생각했다. 내 모든 커리어와 내 가족, 친구들까지 뒤로하고 그의 곁에 있는 게 맞는 건지... 내 세상에서 내가 중심이 되지 못하니 내 존재가 손끝부터 점점 투명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덤덤히 꺼낸 말이 길어질수록 눈물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마음에 꽉 차 있던 검은 감정을 씻어 내듯, 눈물은 하염없이 나왔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울고 울었다. 그도 그제야 내 상태를 알았고 그저 꽉 안아주었다.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많은 말들을 해주었다. 처음 겪는 일이니 모든 게 힘든 것이 당연하다고, 그 또한 내가 없었다면 다시 복귀하고자 하는 생각조차 못했으며, 이 길고 긴 복귀 과정을 견디지 못했을 거라고 얘기해 주었다.
우리는 그날 늦게까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는 남은 한 달 동안 본인이 조금 피곤하지만 날 위한 선택을 해주었다. 이번 한 달 동안은 날 위한 시간을 보내고, 내 마음이 치유되도록 노력해 보자는 말을 남겼다. 나 또한 생각의 방향을 조금 비틀어보기로 했다. 가치 없는 시간을 보내는 거라, 가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다르게 해 보기로 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이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내 병든 마음을 씻어 내고 투명해진 존재에 대해 우리의 가치를 가득 채워갈 시작, 새로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