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리뷰] 당신의 아침은, 안녕하십니까?

2025년, 칼 젠킨스의 팔라디오로 여는 아침

by JIN


1. 합법적 도핑제(Legal Dope)


경쾌한 음악은 도파민 분비를 촉진한다. 특히 무기력하기 쉬운 아침 시간대에 듣는 클래식 음악은 기분 향상과 동기부여, 나아가 집중력 강화를 유도한다. 2011년 맥길(McGill)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경쾌한 음악을 들을 때 우리 뇌는 도파민을 분비하는데, 이는 PET 스캔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고 한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음악은 FDA 승인이 필요 없는 합법적 도핑제인 셈이다.


귀 얇은 나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 직후부터 '매일 아침 클래식 음악 듣기'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고, 벌써 십 수년째 이를 이어오고 있다. 그간의 도핑 이력을 털어놓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공부에 집중해야 했던 대학원 시절에는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A장조로 매일 아침을 열었다. 누가 모차르트 연주곡을 들으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했던가. 효과가 있었다면 지금쯤 하버드대 박사 정도는 땄어야 할 것인데, 타고난 CPU의 한계를 넘어서기에는 모차르트 할아버지의 도움이 역부족이었나 보다.


결혼 이후에는 차분한 성정(性情)을 기르고 마음을 다스리고자 요요마의 바흐 무반주 첼로 연주곡 제1번 G장조로 갈아탔다. 결혼 초 남편과 위태로운 힘겨루기를 할 때마다 요요마 아저씨와 바흐 할아버지 덕을 많이 봤다. 대략 열 번 싸울 것을 아홉 번으로, 일곱 번 화낼 것을 대여섯 번 정도로 줄일 수 있었다. (아무렴...그..랬겠지?)


그리고 마흔 중턱, 다소 안이하고 나태해지기 쉬운 시기에 이르러 선택하게 된 것이 바로 칼 젠킨스(Karl Jenkins)의 현악 협주곡 '팔라디오(Palladio)' 제1악장이다. 나처럼 중년의 위기(?)에 휩쓸려 자칫 삶을 놓아버릴까 두려운 이라면 두 팔 벌려 반길만하니 이 글을 읽는 당신, 일단 한번 검색해 들어보시길!


2. 전사를 깨우는 3분, 팔라디오의 마법


https://youtu.be/250I4sg7P9A?si=EmMQDRIaN_u9WMRZ


팔라디오는 시작부터 모종의 긴장감과 긴박함을 선사한다. 약 4분 남짓의 1악장을 듣고 있자면 마치 한 편의 막장 아침드라마를 본 듯하다. “이제 곧 장모님이 나타나 김치 싸대기를 후릴 것 같은” 심장 쫄깃함,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박진감이 팔라디오 1악장 전반에 서려 있다.


팔라디오 1악장의 또 다른 매력은 여간해선 느끼기 힘든 비장함을 자아낸다는 데 있다. 현관문을 나서기 전 신발 끈을 매면서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뭐 하나 특출 날 것 없는 평범한 40대 아줌마가 험난한 세상과 싸우는 '전사'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중대한 발표나 시험이 있기 직전에 팔라디오 1악장을 들으면, 마치 전투를 목전에 둔 선봉 장군이 된 듯한 기분에 절로 각오를 다지게 된다.


임대차 계약 문제로 건물주와 담판을 지으러 갈 때, 오가는 택시 안에서 무한 반복해서 들었던 곡이 바로 이 곡이다. 이랑과 고랑의 연속인 험난한 인생길도 별것 아닌 듯 헤쳐갈 수 있는 용기. 이십 대와 삼십 대를 거쳐오며 바닥난 용기를 다시금 샘솟게 해주는 이 곡이야말로 매일 아침, 중년의 세상을 여는 음악으로 제격일터.


3. 문외한(門外漢)의 팔라디오 톺아보기


팔라디오의 선율에 깃든 신비한 마력. 음악에 문외한인 내가 그 비밀을 헤아려 내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제1악장과 관련해 알게 된 몇 가지 시답잖은 정보들이 있어, 훗날 나처럼 이 곡에 푹 빠지게 될 청자들을 위해 이를 공유해 본다. 우연찮게 이 글을 보게 되실 음악학 교수님들께는 미리 사과드린다.


유튜브에서 팔라디오를 검색하면 다양한 악기로 연주되는 버전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팔라디오는 본래 현악 5중주를 위해 작곡된 곡이다. 제1악장의 악보를 살펴보면 맨 아랫줄의 첼로와 더블베이스가 4/4박자로 진행하며 묵직하게 중심을 잡아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윗줄부터 차례로 제1, 2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allegretto(조금 빠르게)로 리드미컬하게 반복적인 선율을 이끌어간다.


곡이 계속 진행되면서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은 때로는 동시에, 또 때로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정교하게 합을 이룬다. 그 모양새가 숙련된 검투사의 대련을 연상케 하는데, 리트리트(Retreat)와 페인트(Faint)를 반복하다 칼날이 서로 맞닿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지듯, 두 바이올린의 협연이 긴장감을 자아낸다. 부족한 필력 탓에 이 느낌이 잘 와닿지 않는다면 백문이 불여일청(百問不如一聽)이니 지금 빨리 팔라디오를 검색해 감상해 보기 바란다.


4. 귀로 듣는 건축물: 건축과 음악의 교감


18세기 바로크 음악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에 오래된 걸작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사실 이 곡은 1996년에 발표된 현대곡이다. 아일랜드 태생 작곡가인 칼 젠킨스는 팔라디오주의(Palladionism)를 낳은 16세기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에 영감을 받아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탈리아 비첸차에 위치한 팔라디오의 역작 ‘빌라 로톤다(Villa Rotonda)’를 모티브로 삼았다고 하는데, 빌라 로톤다는 조화, 균형, 그리고 수학적 정확성을 바탕으로 한 건축물로 유명하다.


특히 건축사적으로 빌라 로톤다는 16세기 고전적 르네상스가 추구하던 완벽한 비례를 구현해 낸 양식으로 평가받는데, 팔라디오 건축 철학의 정수가 담긴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철학을 현대 작곡가인 젠킨스가 바로크 시대에 유행했던 합주협주곡 형식을 빌려 음악으로 승화했으니, 그야말로 '귀로 듣는 바로크식 르네상스 건축물'이 탄생한 셈이다.


제1악장의 정확한 리듬과 반복되는 패턴은 팔라디오의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기둥과 아치의 규칙적인 배열을 연상시킨다. 곡이 절정에 이르는 1분 30초 지점에서는 모든 악기가 하나로 어우러지며 웅장한 음악적 아치를 형성하는데, 이는 마치 건축물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음악으로 만든 바티칸 성당, 악보로 그린 시스티나 성당이라고 하면 과언일까.


5. 당신의 아침은 안녕하십니까?


모차르트에서 바흐, 그리고 젠킨스로 이어지는 나의 아침 음악 여정은 단순한 취향의 변화가 아닌, 인생의 각 시기에 필요했던 에너지와 감성의 변화를 반영한다. 명석함과 예리함이 필요했던 학창 시절에는 모차르트의 명쾌함이, 차분한 성숙함을 갖추고자 했던 시기에는 요요마의 손에서 재탄생한 바흐의 완숙함이, 그리고 도전과 새로운 동력이 필요한 지금 이 순간은 젠킨스의 역동성이 나를 이끌고 있다.


팔라디오가 내 아침 루틴의 마지막 정착지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인생의 다음 장에는 또 어떤 음악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는지 지금의 나로선 알 길이 없다. 오십 대 중반에는 필립 글래스(Philip Glass)의 미니멀리즘으로 옮겨갈 수도 있고, 아니면 예상을 뒤엎고 메탈이나 힙합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음악의 힘을 통해 매일 아침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이 작은 의식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아침마다 팔라디오 1악장의 첫 음이 울려 퍼질 때, 나는 용기를 내어 하루라는 이름의 작은 전투를 시작할 준비를 한다. 세상에 맞서는 나만의 전투를 위해 오늘도 비장한 각오로 현관문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에겐, 당신만의 팔라디오가 있는가? 스스로를 부여잡기 위해 아침마다 꺼내 드는 그 한 곡이 있다면, 바로 지금 떠올려보자.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단상] N마리의 고양이를 키우는 것에 관하여..(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