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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 그럼에도 사랑인가?

2008년 어느 날의 끄적임

by JIN


이 글은 2008년에 작성되고 2019년에 발행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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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랬던가, 사랑은 가슴으로 해야 한다고.

뜨거운 열기로 가슴이 벅차오른다면,

네 머리는 충분히 차갑지 않아도 좋을 일이다.

그러나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시린 겨울밤이 찾아오면,

공허한 마음일랑 잠시 베갯머리에 비껴놓고

번뜩이는 이성의 칼날로 네 사랑을 재단해 볼지어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 그리고 살바도르 달리와 갈라가 그러했듯 오로지 상대만을 향한 사랑이 있다. 이들에겐 주변의 시선이나 나이, 국적도 상관없고 결혼 여부나 돈의 많고 적음도 문제 되지 않는다. 레논이 오노와 만났을 때 그는 유부남이었고, 둘의 국적은 달랐으며, 전 세계인이 오노를 마녀로 매도했지만, 사랑과 예술이 그들과 함께하는 한 그런 것쯤은 상관없었다. 스스로 천재라고 말한 가난한 화가 달리가 자신보다 열 살이나 많은 유부녀 갈라를 사랑할 때, 그리고 그녀 역시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고 사랑에 빠지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오로지 사랑과 공기로만 생명을 유지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사랑은 완전무결한 것이었나? 글쎄다. 그 유명한 ‘잃어버린 주말’ 동안 레논은 오노의 비서 메이 팡과 바람을 피웠고, 18개월간 별거했다. 달리 역시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와 섹스를 포함한 우정을 나눴다. 오노나 갈라 또한 그 남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이다.


누구나 순도 100%의 완벽한 사랑을 꿈꾸지만 어차피 부조리한 세계에서 불완전한 인간이 하는 사랑은 완벽할 수 없다. 유한한 시간을 바탕으로 하는 사랑이 얼마나 허무하게 끝을 맺는지 누구나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한번 개봉한 에로스는 결국 부패하게 마련이다. 이처럼 사랑은 찰나의 허상에 불과하거늘, 그럼에도 사랑이란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다들 기를 쓰고 사랑하려 든다. 가슴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 입으면서도, 그럼에도 사랑이란다.


사랑은 상대에 대한 '소유'를 전제로 시작된다. 소유는 집착을 낳는다. 집착은 질투를 유발하며, 질투는 우리를 다소 치졸하고 추악한 감정의 극단으로 매섭게 내몰아 간다. 그리고 또 상처만 남는다. 한데 인간은 어리석게도, 그렇게 상처 받은 영혼을 다시금 또 다른 '사랑'을 통해 치유하고자 한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상처 입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들은 또다시 [소유-집착-질투-상처]로 귀결되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악순환 속으로 뛰어든다. '그럼에도 사랑!'이라고 외치는 인간을 보면 어쩌면 인간의 본성이 그러할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불나방이 뜨거운 줄 알면서도 반복해서 불로 뛰어드는건 내재된 '주광성(走光性)' 탓이다.


그래. 소유하고 집착하고, 질투하고 상처 입는 사랑이 피차 불가피하다 치자.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무엇을 얻는가? 다수는 사랑을 통해 '행복'을 얻는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은 '불행'으로 점철되기 마련이다. 남녀관계는 기실 이별 또는 결혼이라는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이별이 실패한 사랑이라면, 결혼은 성공한 사랑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어야 할 것이다. 성공적인 사랑은 '행복'을 보장해야 할 터이다.


그러나 오로지 나만 바라봐야 하고, 반드시 결혼을 전제로 하는 영원불변의 관계만이 연애의 정답이라면 시작부터 숨이 막힐 지경이다. 끝없이 찾아오는 자유에 대한 갈망. 아담과 이브 때부터 인간이란 원래 유혹에 약한 존재인지라 평생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산다는 건 애초 불가능하다. 결국 사랑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이별과 결혼이라는 선택지. 무엇을 택하건 그 끝은 항상 '불행'으로 치닫기 마련이다. 여기서 질문. 그렇다면 이러한 딜레마를 벗어나, 궁극적으로 '행복'을 가능케하는 사랑은 존재치 않는 것인가? 일체의 구속을 벗어버린 자유의 상큼함과 로맨스의 달콤함은 정녕 양립할 수 없는 것일까?


여기, 자유와 사랑의 양립 가능성을 몸소 실천한 한 커플이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보봐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허한다'는 조건 하에 두 사람은 실험적 계약결혼 관계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기묘한 관계는 50년이 넘게 지속되었다. 파리의 여관방과 카페를 전전하면서 두 사람은 그렇게 사랑과 지성을 나누었고, 이들의 실험적 동반자 관계는 끊임없이 인구에 회자된다. 모노가미를 거부하며 폴리아모리(polyamory)를 표방하는 이들에게 두 커플의 쿨한 사랑은 큰 귀감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한 발자국 물러나 반문해본다. 소유하지만 않는다면 못 견디게 불행할 일도 없을 거라 믿는, 자유와 에로스가 양존하는 평화의 동산에서 사르트르와 보봐르는 항상 행복하기만 했을까? 사르트르와 보봐르는 소유를 전제로 하는 사랑의 본성을 거슬러 '소유치 않고 사랑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들 특별한 커플의 '성공적인' 관계는 결과론에 지나지 않음을 직관적으로 알게 된다. 상대를 완전히 소유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또 다른 '집착'이기 때문이다. '질투’라는 최초의 불안이 시작되면 꿈동산에 길들여진 무방비 상태의 감정은 심장의 뿌리에서 힘없이 튕겨져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곤 서로를 향해 무섭게 달려들어 한바탕 폭풍우를 일으켰을 터.


가뜩이나 시끄러운 인류의 평화와 믿을 수 없는 감정의 안식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사랑의 '사소한' 잔인함 따위는 잠시 모르는 척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보기 좋은 허울에 불과할 뿐이다. 이성으로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감정의 찌꺼기를 걷어내기 위해 그들은 몇 번이나 헛헛한 마음에 비질을 해야만 했을까? 서로의 누군가를 향한 질투를 숨긴 채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만남을 지속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기만이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아픔에 무뎌져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되뇌게 됐을 뿐, 이들의 사랑 또한 종국에는 상처투성이의 가슴만을 남기고 말았을 것이다. 아픔에 내성이 생긴 그들은 이를 부정하고 또 부정하며, 잘 포장된 그들의 관계에 만족을 표했을 테지만.


이쯤 되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랑은 상처를 남기고, 뒤이어 '불행한' 종말을 맞이한다. 한데 어리석은 우리 인간은 그럼에도 사랑을 한다. 아플 줄 알면서, 덧없는 줄 알면서도 사랑을 한다. 신을 기만한 시지프스를 향한 제우스의 저주는 현세에도 계속된다. '행복'이라는 정상에 이르기 위해 제아무리 최선을 다해 바위를 굴려보아도, 정상에 채 다다르기도 전에 '사랑'은 분명 허망하게 바닥으로 치닫고 말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인간이 짊어져야 할 굴레라면, 차라리 평생 사랑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FIN 20081203



덧.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안기 위해 다시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까. 냉철한 이성은 내게 부여잡은 감정의 끄트머리를 그만 놓아버리라 한다. 더 이상 상처 입고 싶지 않다면. 한데 이렇게 망설여지는 걸 보면 나 역시 인간의 숙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 또한 그럼에도... 사랑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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