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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그대로 갈 것인가 되돌아갈 것인가

2009년 어느 날의 끄적임

by JIN

Life

이 글은 2009년에 작성되고 2019년에 발행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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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처럼. 남들같이.


살다 보니 그렇더라. 평범하게,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렵고 힘들기만 하다. 남들 공부할 때 공부하고, 남들 졸업할 때 졸업하고, 남들 밥벌이할 때 밥벌이하다가 그렇게 남들 시집 장가갈 때 결혼해서 아들 딸 하나씩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 그러니까, 그게 쉽지 않더란 말이다. 남들 다 밟는 ‘자연스러운 인생의 수순’이라는데, 어째서 이토록 불편하고 힘들게만 느껴지는 걸까?


뜻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함에 거칠 것 없는 삶. 조금은 더디고 돌아가더라도 언젠가는 원하는 곳에 이르는 삶. 가끔은 손해보고 이용당하더라도 어느 때나 타인에게 손 뻗을 수 있는 삶. 내가 꿈꾸는 삶은 이토록 단순 명료한데, 남들은 ‘평범한 삶’이 아니라 손가락질한다. 뒤처져 있는 삶이라며, 세상 물정 모르는 속 편한 삶이라며 비웃는다. 남들과 같은 속도로 달리기 위해, 저만큼 앞선 이들의 뒤꽁무니를 노려보며 고삐를 다잡고, 박차를 가하라고 한다.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한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소박한 밥상. 고된 일상 속에서나마 도란도란 일상을 나눌 수 있는 여유. 이것 외에는 아무래도 좋을 것 같은데.. 어째서 ‘기름진 밥상’을 위해 두 눈을 질끈 감고 내달려야 하는가? 남들도 그렇게 한다는 그 어정쩡한 이유, 그것 하나만으로.


왼쪽 혹은 오른쪽. 그리고..


수년 전의 일이다. 어느 봄날, 꽃집에서 조그만 화분 하나를 사들고 왔더랬다. 손바닥 한 뼘 만한 싸구려 플라스틱 화분에 아무렇게나 담긴 흙덩이. 그 속에 도톰하게 살 오른 갓난쟁이의 손톱처럼 윤이 나던 녀석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나날이 커가는 녀석의 모습에 신이나, 때맞춰 물 주고 볕에 내다 놓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더랬다. 그러기를 몇 달이 흘렀을까. 문득 작은 고민이 하나 생기고 말았다. 애당초 조금 왼쪽으로 기운 채 싹을 틔운 이 녀석이, 글쎄 시간이 흘러 제법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시점까지도 좀체 바로 돌아설 줄을 모르는 것 아닌가. 꽃집 주인이 알려준 대로 햇살 드는 방향으로 녀석을 두어보기도 하고, 가느다란 지지대를 심어 노끈으로 줄기를 엮어보기도 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녀석의 ‘왼쪽으로 돌아서기’는 도통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저러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져 행여 이파리가 상하진 않을까, 삐딱선을 탄 녀석 때문에 밤낮 골머리를 앓던 터에 문득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나름대로,...... 괜찮지 않아?"


... 그랬다. 사실 녀석에게 똑바로 땅을 딛고, 하늘을 향해 꼿꼿이 솟지 않으면 안 될 절체절명의 이유 따위는 없다. 저렇게 좌우로 난 것이 되려 저 녀석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일 텐데, 무엇이 그리 못마땅해서 갖은 애를 다 써가며 저 녀석을 돌아 세우려 했던 걸까? 어쩌면 그간, 녀석을 뒤덮은 수십 만개의 솜털들 - 하나같이 왼편으로 삐딱하게 돌아누은- 은 나를 노려보며 이렇게 되묻고 있었는지 모른다. “얘, 너는 왜 그렇게 삐딱하게 서있니?”


그때 그 녀석처럼 어쩌면 나도 조금은 왼쪽으로, 혹은 조금은 오른쪽으로 기운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내 딴에는 똑바로 선다는 것이, 남들에게는 늘 기울어 보이는 것이리라. 때문에, ‘평범한 삶’, '남들과 같은 삶'이 그토록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평범하게 살려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내 안의 무언가가, 뜨겁게 솟은 그 무언가가 송두리째 뿌리 뽑히고 말 것이다.


그대로 갈 것인가, 되돌아 갈 것인가.


우리가 헤쳐가는 이 사회는 안타깝게도 그 시절의 나처럼, 꽉 막히고 답답하다. 그래서 모나고 삐뚤어진 이들은 어느 틈에 정을 맞고 주저앉거나, 혹은 투명 인간이 되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존재로 전락해버린다. 잘난 놈은 잘난 대로, 못난 놈은 못난 대로 말이다. 스콧 니어링은 그런 사회에 이골이 났음이 분명하다. 조금 기울어졌다는 이유로 그들을 내치며 기회를 앗아가는 사회를 더는 견뎌낼 수 없었을 터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이 사회에 더는 희망이 없다’는 냉철한 말 한마디를 던지고 단호하게 떠났으리라.


누에가 스스로 실을 토해 몸을 감싸고 제 집을 엮어내듯, 스콧 니어링은 원망과 회한이라는 불순물이 정제된 ‘결연함’을 밭아내어 자신이 옳다고 믿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일구었다. 세상이 더럽다 외치면서도 그저 머금은 담배 연기에 분노와 통한, 슬픔을 담아 내뿜을 뿐인 우리네 삐딱이들에게 그의 삶이 사무치도록 부러운 것은, 아마도 그 같은 ‘결연함'의 부재를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 아닐까. FIN


- Scott Nearing [Man's Search for the Good Life(1954)]을 읽고.. Man's ㅡSearch for The Good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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