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literally 백만 년 만의 끄적임
그럼 이제, 남편 회사에서 데스크나 봐주는 거야? 쉬면서 넷플릭스 자막 없이 보면 편하긴 하겠네~
통번역센터를 그만두던 날, K가 내게 했던 말이다. 고작 쉬는 날 드러누워 자막 없이 넷플릭스나 보고 남편 뒷바라지나 하려고 그렇게 공부했냐는 아니꼬운 비아냥이지만, 통역사 출신인 그녀의 저의를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나는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같은 통역사이기에 할 수 있는 서슬 퍼런, 그러나 온당한 비난이라고 당시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통역사가 되기 위해 정말 오랜 기간 동안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더랬다.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에는 일하는 주독야경(晝讀夜耕)의 나날들이 이어지고, 학기 초만 되면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로 학업의 압박에 시달렸다. 그래도 나는 악착같이 버텼다. 졸업 후 센터에 들어가서도 삶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입사동기가 인권위에 제소하겠다고 입에 달고 다닐 만큼 통역사 선배였던 상사의 갑질은 도가 지나쳤다(결국 동기는 3개월 만에 퇴사하고 하이브로 이직했다). 하지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나는 버티고 또 버텼다.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나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러다 우연찮게 상사의 횡령과 배임 혐의를 발견했고, 결국 모든 걸 까발려 그를 몰아냈다. 당시 센터에서는 이외에도 입에 담지 못할 부당한 일들이 사사로이 벌어지고 있었고, 고민 끝에 찾아간 인사팀에서는 여기서 더 목소리를 내면 윗선까지 타격이 간다며 나에게 신중할 것을 재차 권고했다. 그리곤 행여나 다시 찾아올까 전전긍긍하며 내 눈치를 봤다. 아니다. 눈치를 줬다는 게 맞겠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지만 추후 따로 지면을 빌어 토로하는 게 좋을 듯 하니 이만 총총.)
아무튼 대학원 입시부터 입학과 졸업, 입사와 퇴사라는 이 몇 안 되는 단어들 사이에 험난했던 나의 30대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나의 30대는 압도적인 학업량과 치열한 사회생활이라는 뜨거운 불길에 그을려 일부는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또 일부는 검댕처럼 흉하게 눌어붙어 보는 이의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그래서 나는 나의 30대가 자랑스럽지만, 동시에 혐오스럽다.
혐오라는 워딩이 강렬하긴 하나 그 외에는 달리 당시를 설명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만큼 나의 30대는 참혹하고 또 험난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악착같이 버틴 내가 안쓰럽고 가엾기만 하다. 그래서인지, 사표를 던지고 나오던 당시의 나에게는 단 한 톨의 미련도 남지 않았었다. 40대에 이른 지금 누군가 직업을 물어보면 나는 자랑스럽게 '한때는 통역사였습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스스로가 위선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업계를 떠나던 당시의 심정은 홀가분하고 후련하기만 했다.
혹자의 눈에는 나의 선택이 별거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깟 통역사.. 그게 뭐라고 버리니 마니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역사를 선망하는 이들이나 업계의 생태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에겐 이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놓아버리는 나의 선택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지인들이 "도대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얼마 전 외할머니 장례식에서 오랜만에 얼굴을 본 외삼촌 또한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렇게 공부했는데 아깝지 않냐고 말이다. 하지만 지독한 운명론자인 나는 어떤 변명도 늘어놓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들어 운명의 수레바퀴를 가리켰을 뿐. 어쩌면 이게 내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자위하며 말이다.
운명은 참 묘한 구석이 있어 통역사를 갈망하던 나를 어느 틈에 그 자리로 데려갔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변덕스럽게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놓았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은 운명이다. 아니, 운명일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희박한 확률을 뚫고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운명처럼 결혼을 하고 운명처럼 허니문 베이비를 가졌다. 그리곤 운명처럼 임신 5주 차에 계류유산을 했다. 집에서 회사까지 꼬박 1시간을 이동해 매일 클라이언트와 통번역사들의 요구에 시달리던 일상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던 일들이 그즈음 점점 버겁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운명처럼 남편이 회사를 확장하면서 내가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노산을 향한 시댁의 우려도 동시에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렇게 아주 묘하게, 어느 순간 그 모든 아귀가 들어맞아 회사를, 또 통역사를 그만둬도 되는 상황이 찾아왔다. 그렇게 운명처럼 나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탈출하게 된 것이다.
솔직히, 정말 솔직히 터놓으면, 사실 이 같은 운명의 굴레 속에서 나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왜냐면 더는 아등바등 적성에 맞지 않게 억지로 공부할 필요도 없고, 또 더 이상 누군가에게 신랄하게 나의 말을, 또 글을 평가받는 입장에 놓일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돈 많은 시댁, 전문직 남편을 만나 더 이상 밥벌이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운 좋은 삶인가!"라는 속물적인 마음이 앞선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렇게 이문동을 떠나며 나는 스스로 맹세했다. 이제 다시는 이 업계에 발 딛지 않으리. 앞으로 영어는 쳐다보지도 않고, 단 1분 1초도 글이나 말 나부랭이 따위에 내 삶을 소비하지 않으리. 그렇게 나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더랬다.
그런데 운명이란 또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정확히 5년이 지난 지금, 마흔의 중턱에서 나는 다시금 모니터 앞에 앉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시답지 않은 실력으로 글 한 편 써보겠다며 벌써 몇 시간째 씨름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얄궂은 운명인가... 어디 그뿐인가. 혀가 굳을 대로 굳어 발음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지만 간질대는 입을 못 이겨 이리저리 회화 동아리를 찾아 기웃대기 시작했다 - 물론 전직 통역사임을 밝히진 않고 말이다. 또 동네 독서모임에 가입해 꾸역꾸역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읽어내기 시작한 지 벌써 수개월 째다. 이렇게 운명은 또다시 나를 글밥과 말밥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참으로 신묘하면서도 기이한 일이지 않은가. 책 읽기와 글쓰기.. 정말 너무 싫지만 또 너무 하고 싶어 큰일이다. 이런 제길.. [FIN2025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