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씨 가문이 남긴 유산의 흔적들을 따라 거닐다
구룡반도의 북서부, 중국 심천에 거의 인접해 있는 윈롱(元朗, Yuen Long)은 홍콩에서 옛 전통 양식의 건물들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마을이다.
이 유서 깊은 마을에는 옛날 양식의 벽돌 기와집과 성벽촌을 비롯하여 사원이나, 사당, 돌탑, 우물 등 옛 홍콩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흔적들이 곳곳에 남겨져 있다.
핑샨 헤리티지 트레일(平山, Ping Shan Heritage Trail)은 이처럼 윈롱 일대 곳곳에 흩어져 있는 역사의 유산들을 이어서 만든 트레킹 코스다.
나는 홍콩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옛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행은 언제나 흥미로움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설레는 마음으로 핑샨 헤리티지 트레일을 한 번 가보기로 했다.
나는 이 흥미로운 여행을 위해, MTR 웨스트 레일 라인을 타고, 윈롱역으로 향했다. 윈롱역에 내려 밖으로 나오면, 바로 근처에 경전철 플랫폼이 있는데, 이 곳에서 다시 경전철을 타고, 핑샨으로 떠난다.
윈롱역에서 핑샨까지는 경전철로 약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경전철은 트램처럼 지면 위의 선로를 달리지만, 트램보다 훨씬 현대적이고, 깔끔하다.
‘역사 여행에 어울리지 않게 이런 최신의 경전철이라니…… 홍콩섬의 낡고 오래된 트램이 이 코스에 더 어울릴 텐데……’ 하는 아쉬움이 뇌리를 스쳐간다.
핑샨까지 이동하는 동안,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역시 낡고 오래된 건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삼수이포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거의 무너질 듯 허름하고 낡은 건물들……
이 도시의 건물들은 처음 이 곳에 세워진 이후로, 홍콩의 다른 건물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수십 년간 계속 나이만 들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바깥 구경을 하고 있는 동안, 경전철은 어느새 핑샨에 도착한다. 사실, 윈롱에서 핑샨까지는 다섯 정거장 밖에 되지 않으므로 지루할 틈도 없이 금방 도착할 거리다.
나는 경전철에서 내려 마을 입구로 걸어갔다. 핑샨에서 '틴수이와이'까지 이어지는 핑샨 헤리티지 트레일은 걸어서 약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조금 걸어가니 핑샨 헤리티지 트레일 표지판이 나타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표지판만 잘 따라가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표지판을 따라 걸어가니, 흉측한 폐건물 몇 개를 지나 곧이어 항 메이추엔 마을(Hang MeiTsuen Village)이 나타난다.
이 마을의 입구에서 만나게 되는 첫 번째 헤리티지는 1767년에지어진 홍싱사원(洪聖宮, Hung Shing Temple)이다.
이 사원은 당나라 시대 광둥 지방의 관리였던 홍싱예(洪聖瞖, Hung Shing Yeh)를 모시는 사원이다. 홍싱예는 당시 천문학을 장려하고, 어부들에게 날씨를 정확히 알려주어, 그가 죽은 이후에 어부들은 그를 신으로 모셨다고 한다.
홍싱사원을 지나 바로 근처에서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헤리티지는 쿤팅서실(覲廷書室, Kun Ting Study Hall)이다. 이 건물은 청나라 시대 윈롱 지역의 명문가였던 등씨 가문의 인재를 양성하던 곳이다.
등씨 가문은 11세기 중반 무렵,이 일대에 처음 거주하기 시작하였는데, 12세기 무렵 등씨의 후손이 송나라 왕실의 공주와 혼인을 맺으면서, 이 일대의 명문가로 번영하게 되었다고 한다.
쿤팅 서실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면, 등씨 가문의 조상들을 모신 종갓집 사당, 등씨종사(鄧氏宗祠, Tang Ancestral Hall)가 있다.
등씨종사는 윈롱 일대에 남아 있는 유적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중국 본토의 그 대단한 사당들에 비하면, 그 규모나 화려함 면에서 비할 바는 아니지만, 홍콩에서 보았던 다른 사당들과 비교하면, 꽤 으리으리했다. 하긴, 홍콩 일대에서 가장 명문으로 소문난 등씨 가문의 종갓집 사당이니 어련할까……
등씨종사를 지나면, 이제 좁은 골목길이 나오는데, 이 골목길 사이를 지나 영하우 사원(Yeung Hau Temple)이 있다.
이 작은 사원은 송나라 황제가 적을 피해 구룡으로 피난 갈 때, 그를 도와주었던 장수 하우웡(Hau Wong)을 기리는 사당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사당의 근처에는 또 하나의 유적인 옛 우물터가 있다.
나는 이 옛 우물터를 지나 이어진 골목길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얼마 안 가 오래된 돌담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나타난다. 셩청와이 성벽촌(SheungCheung Wai Walled Village)이다.
이 일대 사람들은 예로부터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돌담으로 둘러싸인 성벽 안에 오밀조밀하게 집을 짓고 모여 살았다고 한다.
성벽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미로처럼 엮인 좁은 골목 사이사이로 작은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다.
이러한 형태의 집단 거주지로 그 보존 형태가 가장 완벽한 곳은 깟힝와이 성벽촌(Kat Hing Wai Walled Village)이다.
윈롱역에서 버스로 여덟 정거장 거리에 있는 이 성벽촌은 과거 등씨가문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고 한다. 형태는 셩청와이 성벽촌과 거의 유사하나, 규모는 조금 더 크다.
셩청와이 성벽촌 아래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토지신을 모시는 토지신단(土地神團)이 있다. 이 토지 신단을 지나 계속 걸어가면, 틴수이와이 역이 나오는데, 그 바로 앞에 핑샨 헤리티지 트레일의 마지막 유적인 초이씽 라우 탑(Tsui Sing Lau Pagoda)이 나타난다.
약 600여 년 전 등씨가문의 후손이 지은 탑으로 “별들이 모이는 탑”이라는 뜻이다. 3층 탑의 꼭대기에는 위대한 별을 상징하는 신상이 모셔져 있다.
과거 등씨 가문의 영화를 반영하듯, 이처럼 윈롱 일대에는 등씨 가문이 남긴 유산들이 곳곳에 남겨져 있다. 핑샨 헤리티지 트레일은 그 옛 번영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여행이다.
곳곳에 숨겨진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떠나는 보물찾기 여행.
아련한 옛 기억 속으로 떠나는 회상 여행.
어느 날 문득, 일상이 무료하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윈롱으로 떠나 보면 어떨까?
홍콩의 현재를 떠나 수백 년 전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은 놀랍게도 단지 1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글/사진) 꾸르베(Courb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