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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Nov 05. 2017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식당을 예약제로 운영하는 데에는 엄마와 나의 편의를 위한 이유도 있지만, 손님들의 시간을 아끼기 위한 이유도 있다. 점심 손님은 대부분 직장인. 직장인들에게 점심시간은 일분일초가 아깝다. 일찍 점심을 먹고, 차도 한잔 마셔야 하고, 이도 닦아야 하고, 오후 근무에 필요한 에너지를 올리기 위해 멍도 좀 때려야 한다.


"오늘 점심 예약은 마감하겠습니다."

"테이블 하나 남았는데?"

"복잡한 주문이 많아서 다 해줄 수가 없어. 오늘은 여기까지만 잘하자."


한 시간의 점심시간. 차로 십여 분, 왕복 이십여 분이 소요되는 식당에 밥을 먹으러 오는 직장인들의 시간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은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식사할 수 있도록 상을 차려놓는 것.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하지만, 예약 시간 내에 상차림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예약을 받지 않는다. 예약까지 했는데 빈 테이블에 앉아 십 분 이상 기다리는 건 내가 생각해도 참 화나는 일이니까.


"사장님, 내일은 닭도리탕 해주세요. 전화드릴게요."

"네. 닭 준비해놓을게요. 인원 수만 체크해주세요."

"잘 먹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삼삼오오,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 왔다 나간 자리를 치운다. 잃어버린 오전을 보상받으려 열심히 먹는 사람들, 잃어버릴 오후를 보상받으려 더욱 열심히 먹는 사람들. 어제 티비에서 본 맛집 정보, 주말여행 계획, 아이의 교육 문제, 회식 장소 물색 같은, 그들이 흘리고 간 이야기들을 함께 치운다.


서른을 갓 넘겼을 때. 직업도 나랑 안 맞는 것 같고, 직장도 나랑 안 맞는 것 같아 거의 매일 술을 마시던 그때. 처음 본 남자와 간 오뎅바에서 자정이 넘도록 서른 살 치기 어린 고민들을 쏟아냈었다. 거기 사장이 지금의 내 나이쯤 됐으려나? 손님은 우리만 남아 있던 상황. 사장은 눈도 풀리고 혀도 꼬인 우리의 얘기를 한참 듣다 자기도 예전에 직장생활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헛헛한 웃음을 지으며. 오뎅바에서 나오며 내가 많이 유치해 보였나 싶은 생각에 순간 술이 깼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녀의 그 헛헛한 웃음은 지금 테이블을 닦는 내 얼굴과 비슷했던 것 같다.


직장인에게 점심은 유독 중요하지. 고심 끝에 선정한 메뉴를 먹으러 식당에 갔는데 음식도 맛있고 대접도 잘 받았다 싶으면, 그날 하루는 여한이 없었지. 여기저기서 받은 스트레스 같은 것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지. 인생 참 별 거 아니라며 흩어졌던 정신을 그러모을 수 있었지. 반면, 점심을 망치면 오후는 엉망이 돼버리지. 괜히 짜증이 나는데 잠까지 오면, 좀 전에 먹은 점심 취소하고 다시 먹고 싶었지.


'나도 한때는 직장인이었는데...'


언젠가, 마이너스 통장이 만들고 싶어 은행에 간 적이 있다. 마이너스 통장 발급 조건을 살피다 적잖이 당황했다. 서류상으로 보면 나는 직업이 없다. 식당은 엄마가 사장님이고, 직원의 인건비를 챙길 정도가 아니라 나는 직원으로도 등록하지 못했다. 책 편집을 하고 있지만, 소속도 없고 수입도 일정하지 않고 관련 자격증도 없어 '전문직'이라 하기에도 애매하다. 번호표 순서를 기다리다 돌아 나왔다.


'나는 직업이 없는 사람이구나.'


소개팅이나 선을 볼 때도 애매하긴 마찬가지다. 엄마 식당에서 일을 돕고 있다고 하면, 나이도 많은데 능력도 없이 엄마에게 빌붙어 빈둥대고 있는 사람이 되고 만다. 엄마 식당 일을 도우며 책을 편집하는 프리랜서라고 하면, 어쩐지 범접하기 어려운 드센 사람이 되고 만다. 직장인일 때는 출판사에 다닌다고 하면 끝이었는데, 지금은 나의 직업이나 직장을 설명하는 일이 꽤나 어렵다.


"저번 주에 소개팅한 건 잘 됐어?"

"연락이 없네."

"왜? 또 인터뷰하다 왔어? 직업 조사만 하고 올 거면 나가지를 마."

"아니. 그분이 거의 질문하셨어. 나는 거의 답만 했어."

"근데 왜 연락이 없어?"

"내가 생각해봤는데. 집에서 엄마 식당 일 돕는 줄 알고 부담 없이 나왔다가 내가 책을 편집하는 프리랜서라고 하면 갑자기 엄청 어렵게 보는 것 같아. 꼭 뭔가를 지적당할 것만 같나?"

"음... 그럴 수도 있지. 그럼 그냥 엄마랑 식당 운영한다고 해."

"그것만 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일부가 차단당하는 거잖아. 그걸 감추고 어떻게 편하게 이야기를 해?"

"어이구, 생각만 많아가지고."


그렇다. 생각만 많아서 애프터도 못 받았다.


다시는 직장생활을 할 일이 없을 거라고, 직장생활을 하지 않아 아쉬운 건 월급 하나뿐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설명하는 게 아직도 어렵다. 사회라는 곳이 참 어렵구나. 일이 있어도 직장이 없으면, 이상하게 움츠러드는구나.


가만 생각해본다. 나는 정말 직장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렇게 믿고 싶은 건 아닐까? 나도 휴가 받아서 여행 가고 페스티벌 가는 거 좋아한다. 퇴근하고 맛집 다니는 것도 좋아한다. 일하기 싫으면 회사 째고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도 좋아한다. 무엇보다 나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걸 좋아한다(는 전 요즘 깨달았다). 이 많은 것들이 직장인의 특권이었다니.


아으, 이런 자존감으로는 시집도 못 갈 것 같은데... 직장생활 다시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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