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 발표를 하려던 장관 뒤에서. 우산을 쳐들던 직원이 사진의 프레임 안에 혹시 들어갈지 모를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고 사라져 버렸다. 혼자 서 있는 기특한 우산이 되기 위해 두 손을 하늘로 길게 빼든 채,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무릎을 꺾었다.
30대엔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는 이상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투명인간 챌린지랄까. 나는 이 도전에 꽤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오가며 그의 귀속에서 자라난 긴털을 훅 불어보거나, 그의 등 뒤에 서서 몰래 키를 재보고 엉덩이를 툭툭 치기도 했다. 하지만 천진난만한 눈알과 들썩거리는 콧김이 그들의 레이더에 걸리지 않도록 두꺼운 안경을 쓰고 무채색의 옷을 고르고 주장 없는 무표정을 연습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용히 의자를 밀어 넣고 방문을 나서곤 했다. 박장대소하지 않으려고 했고 노려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나였더라도, 우산을 받쳐들라면 들었을 것이고 무릎을 꿇으라면 더 빨리 꿇었을 것이다.
돈을 내고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했다. 누구하고라도 락보컬리스트처럼 핏대를 세우며 언쟁할 수 있던 기운 넘치던 20대에도 경계선은 흐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존심을 꺾어야 하는 순간과 자존심을 부려야 하는 시간은 복잡한 계산 수식처럼 느껴졌고. 정답을 찾지 못해 뒷걸음치는 순간에 누군가가... 손가락 하나로 나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곤 했다. 언제부턴가는 누가 누르기도 전에, 먼저 무릎을 꺾어버리는 것을 마지막 자존심의 수호 방법으로 여기기도 했다.
지난날, 굽힐 줄 모르는 몇몇 사람들이 무대에 등장할 때 나는 망또를 벗어던지고 박수를 치며 응원을 보냈지만. 간절히 깃대를 올리며 군중 속의 응원가를 부르기도 했지만. 사라져버린 그들을 여전히 존경하지만. 현실 속의 나는 자주 무릎을 꺾는 사람들에게서 더 큰 동질감을 느낀다. 무릎 따위 꺾어 본 적 있는 사람만 사랑한다. 무릎을 꺾는 순간의 그 복잡한 방정식을 계산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복잡하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기에. 인간이 투명하게 사라져 버릴 때 그것은 그냥 사라짐은 아니다.
무릎 굽히는 것과 무릎을 꺾을 때를 나는 아직도 잘 구분하지 못하며 고개를 쳐들 때와 더욱더 노려봐야할 순간은 여전히 혼란하다. 그러니 어쩌냐면... 고기먹은 날에는 열심히 풀어보고 힘빠지면 대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