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여름이 끝났다. 그리고 러닝 시즌이 돌아왔다. 더위가 사라진 공기, 비 냄새가 아직 남아있는 저녁. 이런 온도와 습도에는 설렘이 있다. 천천히 달리다 보니 떠올랐다. 데이트. 하늘을 뚫어버릴 듯이 울려 퍼지던 청량한 목소리.
* * * *
전날 비가 왔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노천극장의 돌계단이 조금 젖어있었다. 당시에는 대학생들이 플라스틱으로 된 대학 파일 같은 걸 들고 다녀서. 그걸 바닥에 깔고 앉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나는 그냥 앉았다.
"오후에 시간 되면 언니랑 공연 보러 갈래?"
그날의 데이트 약속은 미리 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두 학번 윗선배인 경영학과 S언니는 법정대 미술동아리 대표이기도 했다. 쌍꺼풀 없이 길고 큰 눈에 희고 갸름한 얼굴, 윤기 나는 생머리를 한 S언니는 누가 봐도 호감 가는 차분한 미인이었다. 반면, 중학생 커트머리에 운동화, 등산가방 스틱 끼우는 자리에 골프채 7번 아이언을 끼우고 한쪽 어깨에 화구통까지 둘러멘, 학과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이상한 신입생이었던 나는.(대학에서는 공부하고 싶은 과목 아무거나 들어도 된다고 하길래. 교양 골프와 체대 기초 수영. 미대에 개설되었던 인체 해부 기초 드로잉. 당시 핫하게 부임했던 이인화 교수;;-구속-의 국문과 소설 창작 1 그리고, 정말 왜 들었을까 싶은 '여성호신술 기본' 등을 수강했다;) 평일에 등산 가는 50대 조기 퇴직자들 같은 마음으로 설렁설렁 학교에 놀러 왔다가... 동아리방에서 그 특별한 초대를 받게 된 것이다.
S선배의 데이트였다. 분명 단둘의 데이트를 기대했을 그 오빠에게 등산 가방에 골프 아이언을 대롱대롱 달고 나타난 중학생 깍두기의 등장은 별로 반갑지 않았을 텐데도. 웬일인지 기억 속에 부정적인 감정이 하나도 없다. 그건 아마도 S선배보다도 몇 살 위였을, 하지만 그래 봐야 20대 중후반이었을 그 오라버니의 교양과 아량이 한없이 넓어서 였거나, 내 눈치 없음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그 오라버님은 지금은 사라진 작은 분식집에 데려가 이른 저녁까지 사주었다.
그날 처음 알았다. 우리 학교 후문이 길 하나만 건너면 다른 학교 후문과 연결된다는 것을. 그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옆 학교의 농구부 숙소가 있는데, 지금은 연예인으로 살고 있는 어떤 농구 선수가 당시에는 엄청난 팬들을 거느린 대스타여서, 그 거리에 아무 이유 없이 여고생들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모두 그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아직은 저녁이 되지 않았고, 바람에는 아카시아 꽃향기가 조금 났고.. 그 오라버니와 언니 사이에 흐르는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하면서. 나는 마치 노천극장으로 가는 길을 아는 사람처럼 성큼성큼 먼저 언덕을 올라갔다.
축제기간 하이라이트였던 노천극장 공연의 초대가수는 4번째 앨범 수록곡인 "난 널 사랑해"로 그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신효범이었다. 다른 가수가 몇 명 더 있었을 테지만 그녀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가 "난 널 사랑해, 너의 모든 몸짓이 큰 의미인걸" 부분을 반 옥타브 높여서 부를 때... 공연장 돔 뒤쪽으로 붉게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저렇게 맑고 우람한 목소리로 하늘을 찌를 듯이 "사랑한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니... 소름이 돋았다. 물론 해가 지면서 조금 쌀쌀해진 탓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S언니와 오라버니 사이에 앉아서 마음껏 그 노래를 듣다가, 고개를 돌려 양쪽의 젊은 두 남녀의 옆모습을 살짝살짝 구경했다. 왜 가운데 앉았는지. 눈치 없는 자리 선점의 의도가 S언니의 철벽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나는 정확하게 젊고 아름다운 두 남녀 사이에 앉아버리게 되었다. 그때 오라버니가 겉옷을 벗어서 언니에게 주려고 했는데, 언니는 가방에서 얇은 하늘색 카디건을 꺼내어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그래서 나는 오라버니에게 손을 뻗어 그 점퍼를 받아 내 어깨에 걸쳤던 걸로 기억한다. 웃옷까지 벗어준 그 오빠의 팔뚝에 살짝 오돌토돌 닭살이 돋은 것 같았는데... 못 본 척했다.
며칠 전, S언니와 오랜만에 카톡을 했다. 그리고 그 데이트 얘길 꺼냈다. 이제 막 스무 살이던 인생의 봄. 어쩌면 저에겐 첫 데이트인데 말 입죠. 그게 언니의 데이트에 깍두기로 참관한 것이지요.
껄껄 웃던 언니는... "그놈이 누군지도 기억 안 난다"라는 짧은 답을 주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다 기억하고 있지요. 그날의 언니는 참 예뻤고, 이젠 이름도 모르는 그 닭살 오라버님도 매너가 참 좋았어요. 그리고 신효범은 앙코르곡을 더 불러달라는 학생들의 요청에, 좀 짜증을 냈지요. (그때는 저렇게 아름다운 목소리 가진, 심지어 아름다운 외모까지 가진 가수가 공개적으로 성질을 낸다는 것에 조금 충격을 받았지만. 30년이 흐르고 보니, 그때는 그때의 사정이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좋은 저녁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저녁처럼 말이에요.
*덧붙힘
그 대학 축제 때 신효범 님은 앙코르로 10곡 정도 더 불러주셨어요. 짜증을 냈다고 기억하는 건..."이만하면 됐지? 춥다, 이제 집에 가자" 이런 식의 말투 때문인데. ㅎ 나중에 '불타는 청춘'에 나오시는 걸 보니 원래 그렇게 솔직하고 털털한 분이시더군요. 아마 어린 분들은 잘 모르실 텐데, 전성기의 그녀는 여신풍의 미모에 당대 최고의 가창력 소유자였기 때문에; 저런 솔직한 말투의 미스매치에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30년 전이니까 그땐 저 역시... 촌스러웠거든요. 개인적으로 꼽는 신효범 님의 최고의 노래는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에요.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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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뛰는 어르신의 뒤를 따라 걷다 뛰다 보니 갈림길이 나와... 등 뒤에서 조용히 안녕, 인사를 하고 공원을 빠져나왔다.
덕분에 잘 뛰었습니다. 내일도 만나요. 안녕~
Running ... 정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