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이 첫 만남에서 감탄했듯이 "수식어는 거의 쓰지 않은 채, 팩트만으로 사막을 설명하는" 긴 문장을 쓰는 남자.
수시로 변하는 모래 지형 속에서 길과 땅의 모양을 기록한다는 게 가능한지. 1930년대 초에 실제로 <사막의 지도를 만드는 일>에 뛰어든 유럽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그 무모함과 자신감에 깃든 허세와 낭비 또는 순수함이... 영화의 한 축을 차지하는 '러브 스토리' 주인공, 알마시의 세상이다.
대게 모든 무모한 도전이 그러하듯, 돈 많은 후원자들이 얽힌다. 클리프턴 부인 <캐서린>도 그들 중 한 사람. 대형 샹들리에가 걸린 연회장에서 우아하게 사교댄스를 추는 것도, 남편의 친구들과 함께 사파리 점퍼를 입고 고대 중동의 역사나 신화를 이야기 나누는 것도 가능한 여자. 20세기 초 잘 나가던 시절 영국이 누렸던 풍요로움의 우아함과 나른함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넘치는 여유로부터 오는 그 예민함이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온다는 리디아의 어리석은 왕 칸타울레스. 아내를 자랑하고 싶은 치기를 비웃은 여왕의 단호함과 영민함은 이런 모습일까
거대한 왕국을 이뤘다가 부질없이 사라져간 고대 중동 문명의 역사를 알고, 사막에 사는 모든 부족의 언어를 아는 남자. 사막을 아는 사람. 하지만 그에게 다가온 사랑의 감정은 혼란과 욕망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는 깜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그녀를 보지 않는 척하다가 그녀를 배척한다.
안쏘니 밍겔라 감독이 섬세하게 구현해낸 알마시의 구애의 과정은, 인류의 소년들이 처음 사랑이라는 감정으로부터 겪게 되는 좌중우돌 일정표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1. 사랑에 빠진다.
2. 상대의 가벼운 친절을 과하게 배척한다. <됐어요. 그림 안 줘도 돼요>
3. <알마시, 당신 좀 무례한 거 알아요?> 혼난다.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다.
4. 다시 사랑에 빠진다.
5. 일방적으로 구애한다.
6. 협박하고 매달리고 삐진다.
영화 속에서 <알마시>로 분한 <랄프 파인즈>의 눈빛은 -그가 나중에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거의 먹잇감을 정조준하고 있는 맹금류 같다. 20년 후에야 다시 영화를 보면서... 결코 짧지 않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집중력을 잃지 않게 하는 긴장감의 반은 랄프의 눈빛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눈빛을 빛나게 받아준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의 섬세한 연기에 박수를 보낸다.
예쁘다를 넘어서는 위엄. 그게 배우가 순수히 연기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캐서린> 역을 맡은 스콧 토마스의 이지적이고 침착한 표정은 이 영화를 섹시함을 완성시킨다. 무모하고 불같은 연애로 뛰어드는 여자일수록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욕망을 선택하는 여자의 단호함. 결국 자신을 사랑한 남자들을 모두 죽이게 될 여왕벌의 우아함.
영화 속, 회자되는 <쇄골 절흔> 장면에 크게 감흥이 안 생기는 이유는... 아마도 남자들이 가지는(불가능한) "소유 욕망"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다.
밀회 장면이 좋은 이유는 <캐서린>의 캐릭터가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반포기한 채로 더위에 허덕이고 있는 <알마시>의 노란 방으로 그녀가 들어선다. 거의 여왕님이 납시듯이. 놀란 눈의 알마시는 무릎을 꿇고, 그녀를 알현한다. 그의 머릿속에 남은 모래의 향기. <캐서린>은 그 남자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기에 머뭇거림이 없다. 알마시가 말하듯 그는 정복당한 하인이며, 노예다. 농담 같은 진담에 그녀는 그의 머리를 두들겨 팬다. 다시 봐도 웃음이 날 정도로 이 장면이 좋은데, 그건 개취인 것 같다. "저만큼 맞아도 짜증을 안내다니... 저건 사랑이다."
<앤서니 밍겔라> 감독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20년도 넘은 질문인데, 캐서린이 알마시에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이다. 노천 극장의 데이트에서 이제껏 침착하던 그녀가 딱 한번 울더니... 곧 이별을 고하는데. 돌아서는 순간 노천극장 쇠기둥에 머리를 꿍하고 찧는다. 아니? 풉! 아프겠는데?? 그때도 놀랐고 지금도 의문인데, 나름 진지한 이별의 순간에... 여배우를 우습게 만들어버린 속내는 무엇일까? 연출 중 사고였다면 분명 다시 찍었을 텐데. 영화는 그냥 스무스하게 다음 장면으로 가버린다.
감독은 <마이클 온다체> 원작의 거의 모든 부분을 다 털어내고, 다시 각색했다. 특히 <캐서린>의 캐릭터는 거의 새로 구축한 것이나 다름없다. 시종일관 우아하고 마지막 순간조차 아름답게 묘사했던 그녀를 딱 한번, 무너뜨렸다. 궁금하다. "머리 엄청 두들겨팬 거 복수해준거죠?"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다른 한축을 이루고 있는 <해나>와 <킵>의 사랑도 아름답다. 멋진 장면도 너무 많고, 캐릭터 구축도 너무 좋다. 특히 <줄리엣 비노쉬>는 젊은 날 <퐁네프의 연인들>로 우리를 설레게 했던 그 모습 그대로 눈웃음을 치며 빗속을 뛰어다닌다.
하지만, 영화는 역시 엔딩.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엔딩은 <앤써니 밍겔라> 감독이 <영국인 환자>의 주제를 영화적으로 압축한... 이 이야기의 눈부신 시작이자 끝이라고 생각한다.
남편 <클리프턴>의 경비행기가 모래사막에 추락하는 순간, 부부라는 합법적인 결연관계는 요란하게 박살난다.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고 싶었던 절망은 모래먼지 속에 흩어지고 캐서린은 외모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간직한 채로- 대신 온몸의 뼈가 부서진 채- <알마시>에게 안겼다.
거의 죽을 정도의 상태에서야, 진실을 말해주는 캐서린.
거의 죽을 상태가 돼서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하나의 사랑"임을 말하는 그녀. 빨리 좀 알려주지... 그걸 또 그제야 알아들은 남자는 어쩌라고.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서간줄 알았던 사랑은 파국의 끝에서야 희미하게 식어가는 목숨으로 남은 시간을 던졌고, 알마시에게 선택지는 없다.
여왕님은 끝까지 여왕님이었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자신의 남편 클리프턴을 제대로 묻어주길 원했고, 알마시가 자신을 구하러 와주기를 바랐다. <알마시> 꿀벌은 거의 불가능한 미션을 해내려고 애쓴다. 날개가 뜯기고 더듬이가 뽑힌 채로. "헝가리식 이상한 이름" 때문에 혹은 그 모든 불가능한 것들의 조합때문에... 그는 제 시간에 올 수 없었다.
그녀를 만난 처음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허둥댔던 남자.
세상의 모든 노래 가사를 알고, 사막을 떠도는 베두인들의 언어를 알고, 시시각각 변하는 모래 지형 속에 숨겨진 오아시스의 위치를 알고, 영광 속에 흩어져간 고대 문명의 역사를 알았건만. 그녀를 '나의 아내'라고 외친 그 순간은 그녀가 죽어가던 시간이었다.
웨딩드레스처럼 하얀 천을 흩날리며 죽은 <아내>를 안고 걸어 나오는 <알마시>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해지면 사라져버릴 사막의 그림자처럼, 알 수 없는 언어로 나지막이 울리는 모르는 나라의 자장가처럼... 그는 모래 속으로 사라져간다.
사랑 때문에 죽을 수 있을까.
알고 있던 모든 지식이 무의미해지고, 도덕과 윤리조차 무화시키는 "그/그녀'를 만나.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숨기며 돌아섰다가 밤새 뒤척이다가 달려갔다가 숭배했다가 굴복했다가 매달렸다가 나를 미워했다가 그랬던 나 자신조차 지워버렸던 순간에. 우리도 한번쯤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