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본 <다머>. 잔혹한 연쇄 살인범을 다룬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 감독은 긴 시간을 할애해, 실제 피해자들의 얼굴과 이름을 하나하나 보여준다. 억울하게 죽어간 젊은 얼굴을 기억해달라는 의미였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영정과 위패... 그 수많은, 이름들에 무너졌던 기억이 있다. 단 한 사람 한 사람의 절멸의 무게에, 그 어린 이름들이 더해 고통과 참담함이 곱으로 폭발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되었다. 하지만... 숙제를 제대로 풀지 못했다. 또 다시... 지키지 못했다. 우리는 실패했다.
이름없는 사건, 추상화된 의미는 쉽게 흩어진다. 희생자들의 이름은... 고인 한 사람 한 사람, 그의 유가족에게는 그 자체로 지울 수없이 애달픈 의미겠지만... 또한 참사의 당사자로서의 객관적 사실이자 역사적 실체다. 그 억울함과 비통함을 스스로는 말할 수조차 없는, 한때 우리 곁에 살았던... 지금도 곁에 살아 있어야 할, 그들의 이름과 얼굴은. 우리의 기억에 남겨질 유일한 한 줌이다.
사회적 참사의 고통과 비극을 개인화시키는 일은 독재국가에서는 비일비재하다. 피할 수 있었던 인재 앞에 희생자의 이름을 되뇌는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이 우리의 잘못이고 숙제이기 때문이다. 해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되풀이될 구조적인 문제를 "프라이버시"라며 개인화시키는 것은 '우아하게' 다 같이 퇴행하자는 얘기이고, 문제를 방치하자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여전히, 언제라도, 우리는 그 골목에 서 있을 수 있다. 단지 행복하고 싶었을 뿐인 그날의 해맑은 모습으로.
... 숨기려는 자는 범인이다. 희생자들의 이름과 얼굴이 두려운 자들은 오직. 가해자들 뿐이다. 당신은 어디에 설 것인가. 바라보고 아파야 한다. 아픈 것이 정상이다. 그들의 이름 그들의 얼굴은 그렇게...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지려는 공동체가 가슴 깊이 새겨 넣는, "고통스러운 질문"이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