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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에살다 Apr 11. 2022

수많은 백이진들이 서성이고 있다.

- 전주한옥마을 한벽굴 이야기

라마 <스물 다섯 스물 하나> 마지막 장면에서 중년 나희도의 마음속 청년 백이진은 떠나지 못한 채 여전히 굴 입구에서 서성인다. 잘못된 이별로 그녀는 아직 그녀의 청춘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중년이 된 희도는 이제 그를 떠나보내려 추억의 굴을 찾는다. 희도는 그를 떠나보내며 말한다. "이번에는 네가 먼저 가"

이 마지막 대사는 단지 이진을 향한 작별 인사만은 아니다. 다시는 못 올 청춘과의 작별이자 위로이며, 마음 한 켠에 남아 있는 아픈 쐐기를 녹아내는 치유이다. 그런데 그 마지막 대사는 드라마 공간을 넘어 역사 공간에서도 치유와 작별을 건넨다.

드라마에 나오는 청춘의 굴은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한 한벽굴이다. 한옥마을에서도 외곽에 위치해 있고 지나가는 위치라서 한벽굴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드라마 촬영으로 최근 관광객이 찾는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사실 한벽굴은 전주시의 오래된 포토존이었다. 전주 팔경 중 하나인 한벽루가 바로 옆에 있다. 그런데 한벽굴은 아픔과 설움이 묻어 있는 곳이다.

한벽굴은 과거 일제강점기인 1931년 10월 전라선 전주~남원 구간과 함께 개통되었다. 일제는 호남 쌀과 한우를 수탈하기 위해 전라선을 놓았으며 조선의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한벽굴을 팠다. 한벽굴은 수탈의 상징이었다. 호남 농민의 피눈물이 흐르며, 민족 독립의 꿈마저 흔들리게 하는 일제의 식민 지배 현장이었다.


일제로부터 독립했지만, 한벽굴은 여전히 아픔과 설움으로 가득 찼다. 한국 전쟁 당시 한벽굴에 몸을 피한 피난민 수 십 명이 미 공군 F-86 세이버 전투기 편대의 오인 사격으로 난사당했다. 억울한 죽음의 행진은 계속되었다.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 한벽굴에서 몸을 던진 자살자가 급증했다. 당시는 공업화와 고도성장을 추구하던 박정희 유신 시절이었다. 압축 성장으로 떠밀리고 경쟁으로 파괴된 이들이 가족과 함께 한벽굴을 지나는 기차에게 몸을 던졌다.

반공과 경제성장을 기치로 내건 전체주의 사회는 한벽굴 죽음을 사회에 저항하는 불온한 죽음으로 여겨 침묵을 강조했다. 한벽굴 입구에는 아직 떠나지 않은 수많은 백이진들이 있다. 시대가 만들어 낸 아픔으로 잘못된 이별을 한 채 굴 앞을 서성인다. 한벽굴에서 펼쳐진 역사 공간 안에서 백이진들은 누구를 위한 전쟁이고 누구를 위한 경제 성장인지 묻는다.


이 질문을 하는 백이진들이 어찌 한벽굴에만 있을까? 한국 근현대사에 얼마나 많은 백이진들이 있었는가? 진정한 위로 한 마디가 담긴 작별을 하지 못한 백이진들이 아닌가? 수많은 역사 공간에 서성대는 백이진이 여전하다는 건 지금 이 시대 역시 굴 앞에서 서성일 여러 백이진들을 만든다는 뜻이다. 자 이제 이들에게 "이번에는 네가 먼저 가"라고 진정한 작별을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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