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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페코 Jun 26. 2020

하얀색 두루마리 휴지

페코의 라이프스타일 에세이. 짧은 글 01

이사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집에 놀러 온 친구가 말했다. “왠지 너가 쓰는 휴지가 따로 있을 것 같아서 휴지는 안 사 왔어.”


놀랍다. 어떻게 알았을까. 그랬다. 나는 하얀색 두루마리 휴지만 사용한다. 휴지에 점점이 수 놓인 패턴까지 꼭 하얀 것으로. 혹여 어딘가에서 색깔이 들어간, 꽃내음 폴폴 나는 두루마리 휴지를 선물 받기라도 하면 사용하는 내내 휴지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기 일쑤다.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휴지가 좋아 봤자 얼마나 좋을 것이며, 때문에 두껍고 부드럽고 먼지 덜 나는 것이 제일이란 걸 잘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내게 있어 휴지는 분명 하얀색 휴지가 제일이다.


휴지 그게  머라고. 거참, 피곤하게 사네”라고 할 테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별수 있나. 별것도 아닌 두루마리 휴지 색깔조차 신경 쓰이는 게 나란 사람인 걸. “그런데요.. 여러분. 이렇게 사는 것도  생각만큼 피곤하진 않아요. 왜냐고요?” 하얀색 휴지면 어떤 브랜드건 아무 상관없는, 나름대로 선택의 쿨~함을 가졌으니까.  


어릴 적 들었던 무서운 이야기는 왜 하필, 휴지 색깔로 어린아이들의 공포심을 자극했을까.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에 오들거렸던 어린날. 지금이라면 쓸데없는 대담함으로 하얀 휴지로 주면 안 되겠냐고 정중히 물어볼 수 있을 텐데. 별것도 아닌 휴지 색깔이 때론 이야기의 소재가 되고, 때론 누군가의 취향이 될 수도 있음이 그저 신기하다.

누군가가 하얀색 두루마리 휴지만을 찾게 된 이유를 묻는다면, ‘새하얀 욕실에 걸려있는 새하얀 두루마리 휴지. 상상만으로도 깨끗함이 느껴지는  순. 백. 의 그 느낌이 참 좋았다. 복잡하지 않을 것. 넘쳐나지 않을 것. 널어두지 않을 것. 딱 그만큼을 유지하며 간결한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하얀색에 담기는 것 같아 좋았다.’ 고 말할 것이다.


오래전, 내가 관심 두지 않으면, 그 누구도 관심 주지 않을. 별거 아닌 아주 작은 것에까지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왜? 내가 나를 아껴주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요.” 내가 나를 아껴주면,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면. 신기하게도 남들 역시 나를 그렇게 대하는 것 같고, 나 역시도 남들을 그렇게 대할 수 있다.


좋아하는 것 전부가 취향이 될 수는 없겠지만, 오래도록 좋아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취향이다. 취향은 아무리 별거 아니어도 나에게만큼은 소중하고 기분 좋은, 그냥 그런 것이다.


또, 오늘 아침 변기에 앉아 하얀색 두루마리 휴지를 바라보며 ‘역시 휴지는 하얀색이지’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하얀색 두루마리 휴지의 깨끗하고 정갈하고 단정한 그 모습을, 나는 앞으로도 계속 쭉 좋아하겠지, 그래서 그것이 오랫동안 계속 쭉 취향으로 남겠지 싶었다.

-end-



NOTICE. 제가 기록하는 브런치 매거진 '디자이너가 사는 집'이 '집에 관한 취향 있는 기록'으로 제목이 변경되었습니다. 이전보다 더 에세이다운 글을 쓰고 싶어 졌기 때문이에요. 사실 이전 글을 쓸 때, 저의 주전공인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를 글에 조금이라도 녹여내려다보니, 글을 쓰기가 부담스러워지고 그만큼 글을 쓰는 텀도 길어지고 결과적으로 글쓰기를 미루게 되는, 좋지 않은 결과가 계속 이어져 마음이 정말 무거웠거든요. 처음 브런치를 시작했던 이유는 많은 글로 자주자주 소통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어요. 조금 더 자주, 조금 더 많은 글로 소통하기 위해선 나 스스로가 부담 없이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그래서 글의 형식을 조금 바꾸어보았어요.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오늘부터 새로 시작하는 '집에 관한 취향 있는 기록'도 많이 많이 읽어주세요!




@mrs.pec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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