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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페코 Aug 27. 2020

부부의 (주)방

페코의 라이프스타일 에세이. 짧은 글 04.

우리 부부는 저녁밥을 먹은 후, 설거지를 꼭 함께 한다. 내가 그릇을 씻어주면, 브로가 물기를 닦아 제자리에 넣는 것이 보통. 물론 그릇을 제자리에 넣을 때 “이거 어디에 있었지?”라는 질문에 몇 번이고 대답을 해줘야 하는 것이 조금 귀찮을 때도 있지만, 하루를 같이 마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을 때가 많다.


세계 최고의 부자,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 창업주)와 제프 베조스(아마존 CEO) 또한 설거지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는 기사를 보고, 억만장자도 먹고 사는 건 다 똑같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조금 웃겼다. 그런데 놀라운 건, ‘집중’해서 설거지를 할 경우 스트레스가 27%나 감소한다는 과학적 사실이었다. (2015년, 플로리다 주립대학 연구결과) 단순한 집안일이 잡념을 덜어내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 줘, 스트레스 완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 분단위로 바쁜 억만장자가 왜 밤마다 설거지를 하며 즐거워했는지 이제 좀 이해가 간다.


설거지가 나의 스트레스 완화에도 도움을 주는지는 알 길 없지만 (왜인지 나는 설거지가 많으면 짜증이 올라온다), 분명한 건 ‘함께 설거지하는 시간’이 우리 부부에겐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설거지를 하며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고, 무엇보다 브로에게 살림 팁을 전수(?)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간.


어릴 적, 혼자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엄마의 뒷모습이 정말 싫었다. 싱크대 앞 엄마를 뒤로 한채, 우리끼리 TV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거리는 것이 속으로 엄청 미안했다. 이다음에 어른이 되어 ‘저기 서 있을 내 뒷모습도 저렇겠지’ 싶어 괜히 더 속이 상했으려나?. 결혼 후, 등을 보이며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 싱크대 구조에 매일을 투덜대며 살림을 살았다.


작년에 집 인테리어 공사를 하면서 싱크대를 과감하게 벽면에서 떼어내기로 결정했다. 누군가에게 등을 보이며 싱크대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 마주 보는 형식의 싱크볼 동선을 짜고, 양쪽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수전을 위치시켰다. 혼자 사용할 땐 거실을 보고 서 있을 수 있고, 둘이 사용할 땐 마주 보고 서 있을 수 있는 구조. 2인 1조로 브로와 내가 합을 맞춰 설거지를 함께 할 수 있는 구조. 싱크대를 2배로 넓게 사용할 수 있는 그런 구조를 생각했다.  


열 번도 넘게, 나 혼자, 그리고 브로와 함께 시뮬레이션해보고 결정한 이 공간구조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그런 공간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같이 설거지를 할 때, “잠깐만”, “옆으로 좀 가봐”, “나 먼저 써도 돼?”와 같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비어있는 쪽으로 돌아가 싱크대를 사용하면 그만이다.


이젠 설거지가 아닌 요리를 함께 할 때도, 냉장고와 가까운 바깥쪽 공간에서는 브로가 야채를 씻어주고, 인덕션과 가까운 안쪽 공간에서는 내가 재료를 손질해 요리 준비를 할 수 있다. 주방을 함께 공유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바랬던 부부의 (주)방이었다.

-end-



@mrs.pec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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