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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 스타킹 Sep 03. 2022

그가 아직 살아 있기는 할까?

여행을 기억하는 중 (1)

여름에 떠났는데 돌아오니 가을이다. 징검다리 건너듯 낯선 곳을 하나씩 밟고 다녔다.


워싱턴 D.C에서는 모든 길의 직선과 건물의 수평적 스케일에 압도되었다. 볼티모어 작은 항구 마을에서는 바다를 바라보며 긴장된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뉴욕은 멀리서 보이는 신기루 같았다. 내게는 잡히지 않는 어떤 것들. 나의 막연한 기대와는 다른 것들이 그곳에 있었다. 보스턴은 이런가 하면 저런 것 같았고 저런가 하면 이런 거 같은 도시다.


징검다리 위에서는 수면 위로도 아래로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래도 본 것 들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이 생긴다.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을 품는다.




워싱턴 DC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택시 안. 어딘가 익숙한 하지만 장르를 알 수 없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흐른다기보다는 둠칫 둠칫 리듬을 타고 춤추게 하는 음악이었다. 남미 음악이냐고 물었다. 택시 기사는 카메룬 음악이라고 했다.


카메룬이라니....


25년 전 나는 그곳에 있었다. 지금 내 나이를 반으로 접으면 그 시절에 가 닿는다. 나는 카메룬의 수도 어딘가에 살고 있었다. 그도 그랬다.


사방이 둘러진 콘크리트 벽, 붉은 흙이 고르게 펼쳐진 건물 바닥, 거실-방-화장실에는 틀만 세워진 문. 그는 그곳을 집이라고 불렀다. 수입이 생기면 조금씩 지어나가는 그의 집.


거실이라 불리는 곳에는 둥근 카펫도 놓여 있었다. 우리는 녹색 칠판을 앞에 두고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그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학생 서너 명을 놓고도 항상 하얀 셔츠에 줄 세워진 슈트를 입고 있던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지적이고 매혹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유니베르시떼 드 야운데 정치학 박사 과정 중인 그는 공부가 끝나면 정치를 하고 싶다고, 대통령이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수업이 끝나면 거친 곡물 질감이 느껴지는 쿠키와 뜨거운 차를 마셨다. 거실 안의 묵직하고 더운 공기는 여러 번 나누어 내리는 한낮에 스콜로 서늘해지기를 반복했다. 아프리카식 프랑스어를 말하는 그의 이야기는 뜨겁기도 하고 서늘하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 몰려드는 거리의 아이들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하얀 얼굴을 가진 동양 여자인 나는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고, 1달러 지폐를 나누어 주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도 했다.


걷기도 했지만 버스나 택시를 타기도 했는데 '가, 나, 다, 라'가 쓰여진 한글 번호판과 OO 운수의 한국산 중고차들이 대부분이었다.


문이 열린 채로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뚫고 버스에 올라타거나 내려야 했다. 택시는 합승을 하거나 따블, 따따블을 외치며 흥정을 해야 했는데 올라탄 택시는 바닥이 뜯겨져 달리는 길이 보였다. 닫히지 않는 차 문을 두 손으로 끌어당겨 목적지까지 붙들고 다니기도 하면서 공사를 멈춘 폐허처럼 버려진 건물들을 지나 시내 곳곳을 그렇게 달렸다.


나를 돕거나 내가 돕는 현지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일도 있었다. 몸이 좋지 않아 며칠 쉬겠다는 연락을 받고 그 이후로 볼 수 없게 된 사람들. 에이즈 감염으로 내 곁에 있던 사람들 몇몇은 그렇게 조용히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외국인과 부유층이 드나드는 고급 호텔에서는 거리의 아이들이 한 달 동안 생활할 수 있는 비용으로 와인을 마시고 칵테일을 즐겼다. 나는 무장 경찰이 24시간 지키고 있는 대사관저를 드나들기도 했는데 만찬이 열리는 그곳에서는 흰옷을 입은 아프리칸 서번트들이 굳은 표정으로 한 줄로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를 초대한 호스티스가 우아하게 골든벨을 흔들어대면 그들은 빠르게 다가와 우리의 시중을 들었다.   


문득 그곳의 모든 것이 궁금해졌다.


우연이겠지만 택시 기사는 25년 전 그곳을 떠났다고 했다. 유럽 여러 나라를 거쳐 미국에 정착했는데 몇 달 전 처음으로 고향에 다녀왔다고.


그의 가족은, 내가 머물던 그곳은 잘 있는지 물었다. 그는 음악에 맞춰 흥얼거리며 대답했다. 40년 동안 독재자가 지배하는 나라가 잘 있을 일이 있겠냐고. 그 시절 그대로이며 프랑스어와 영어 사용 지역의 내전으로 지금은 살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가벼운 목소리였지만 무겁게 들렸다.  


그는 미국에서의 삶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워싱턴 DC와 맞닿은 버지니아 학군 좋은 동네에서 아내와 딸 둘과 함께 살고 있다며. 그는 나에게 물었다. “아니 25년 전 카메룬에도 가 보았다는 사람이 어떻게 워싱턴 DC를 처음 옵니까?”.


나는 혼잣말로 답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그는 어두운 ,  빛만 보이는 거리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그의 자랑스러운 워싱턴 DC 소개했다.


나의 프랑스어 선생님은 정치인이 되었을까? 대통령이 되겠다는 그의 꿈은 이루어질까? 아니 그가 아직 살아 있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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