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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작 Jan 26. 2024

책 <길 위에서> 그리고 <미국인들>


미국에서 사진 공부를 하던 7학기 째, 나는 포토에세이를 작업 중이었고 사진과 함께 들어갈 글들의 영어 문구에 골몰하고 있었다. 크리틱 시간, 적절한 영어표현을 찾는 게 무척 고민이라고 하자 여든 가까이 되신 할머니 교수께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분은 '잭 케루악' 얘기를 꺼내며 “네이티브처럼 정확하고 세련되게 쓰려하지 말고 그냥 너의 영어로 쓰면 어때? 넌 미국에서 태어난 것도, 오래 산 것도 아닌데, 네이티브들처럼 쓰는 게 더 어색한 거 아냐?"


그 말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영어 콤플렉스를 가진 한국사회에서 살아오는 동안, 너무 틀리지 않으려 강박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는지. 언어도 결국은 그 진정성이 중요한데 말이다. 아울러 그 일은 잭 케루악에 대해 더 궁금하게 만들었던 계기였다.

    

내가 잭 케루악을 처음 접한 것은 오래전 로버트 프랭크의 <The Americans 미국인들>이라는 사진집에서였다. 스위스 출생인 로버트 프랭크는 나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온 사진가였다. 그는 애초부터 이 <미국인들> 사진집 서문을 쓸 작가로 잭 케루악을 점찍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케루악은 한창 잘 나가는 작가였고 자신은 무명의 사진가. 그래서 그가 참석하는 모임에 우연을 가장해 찾아가 부탁했고, 결국 사진들을 본 잭 케루악이 허락했다고 한다. 성격이나 글이 무척 도전적일 거라는 상상을 갖게 한 사람이었다.

    

소설 <길 위에서>는 잭 케루악의 소설이다. 사진집 <미국인들>과 소설 <길 위에서>는 말 그대로 '길 위에서' 작업한 결과물들이다. <길 위에서>는 '샐 파라다이스'라는 무명작가의 미대륙 횡단에 관한 이야기, 사실상 잭 케루악의 자전적 소설이다. 그가 '딘 모리어티'라는,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를 연상시키는 열정적인 영혼과 함께 떠난 꿈을 향한 뜨거운 투쟁기다.


반면, 사진집 <미국인들>은 로버트 프랭크가 구겐하임 재단의 후원을 받아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찍은 사진들을 모은 것이다. 이상이 아닌 현실 속 미국의 실상을 담았다. 로버트 프랭크는 총 2만 8천 장을 찍었고 그중 83장 만을 추려 사진집을 냈는데, 이게 바로 현대사진사의 걸작으로 불리는 <미국인들>이다.


두 작품은 공통점이 많다. 로버트 프랭크는 이민자 출신이고 잭 케루악도 프랑스 이민자의 후손이면서 기성 체제에 반기를 든 반항자였다. 둘 다 미국 주류사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작품 내용 역시 스스로 밝혔듯 둘 다 '즉흥적 improvised' 결과물이었다. <미국인들>은 인종차별, 매카시즘, 계급 등 당시 미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러한 사실들이 못마땅한 평론계에서는 사진 기술적인 이유를 들어 에둘러 비난해 댔다. 초점이 안 맞는다느니, 노출이 부족하다느니, 프레임이나 크로핑(cropping)이 어설프다니 등등. 결국 <미국인들>은 첫 출판을 미국이 아닌 프랑스에서 하게 된다.

    

<길 위에서> 역시 당시 보수적인 미국 출판업계에서 시선이 곱지 않았다. 마약, 섹스, 사회비판, 난무하는 욕설 등 한마디로 '불경스럽고 점잖지 못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법조차 멋대로였다. 컬럼비아 대학을 체육특기자로 들어갔던 잭 케루악은 정식으로 문학수업을 받지 않았고 그마저도 중도에 그만뒀다. 게다가 <길 위에서>는 타이핑 용지에 휘갈기듯 써 내려가 3주 만에 탈고를 한 글이었다. 그가 말했듯, 글 역시 재즈처럼 즉흥적이었고 당연히 문체가 다듬어질 리 만무했다.

    

하지만 잭 케루악으로 인해 연결된 공통점 말고도, 장르도 형식도 창작 동기와 배경도 다른 이 두 작품에 나는 깊은 공감과 유대를 느낀다. 그것은 바로 '자유'다. 동시에, 기존에 구축된 모든 선입견과 외적인 압박으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하다.


로버트 프랭크가 위대한 것은 재래적인 기록 방법에서 탈피해 순전히 사진가 자신의 눈으로 대상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잭 케루악은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운 스스로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길 위에서>를 읽으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장 자유로울 때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누구와 함께 할 때 가장 자유로울까'. 그리고 '무엇을 위할 때일까’.

    

어쩌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지 모른다. 앞 세대들이 정해놓은 '가치'들을 아무 의문 없이 신봉하고 그것들을 제도화해서 우리 자신은 물론 뒷 세대를 구속시키려 한다. 고작 자신의 삶도 제대로 살지 못하고 갈 거면서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종족 번식의 본능과도 같은 것 아닐까. 시치푸스의 신화처럼, 멈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계속 지속해야만 하는 무의식 속 강박처럼 말이다. 과연 무엇을 위해 우리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잭 케루악은 <길 위에서> 속에서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러시아워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시간에, 길에 익숙해진 순진한 눈으로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끝없이 서로 으르렁대는 뉴욕의 절대적인 광기와 환상적인 혼잡함을, 그 미친 꿈을 보았다. 움켜쥐고 낚아채고 건네주고 한숨 쉬고 죽음을 맞아서 결국은 롱아일랜드시티 너머의 끔찍한 공동묘지 도시들 중 하나에 묻히는 것이다. 마천루로 가득한 이곳, 이 땅의 동쪽 끝은 미국이 태어난 곳이다."

    

허무하다. 나 역시 그 안에서 허우적대지만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세상에 홀로 떨어진 듯 고고한 척 살아갈 수도 없다. 그렇다면 결국 구속과 자유 그 둘 사이의 줄다리기다. 균형이 어느 지점에서 이루어지는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이다. 순도 백 프로의 극단을 제외한 나머지 어디쯤에서 우리는 각자 살아간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들을 보며 생각해 본다. 나의 선택은 지금 어디쯤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어느 지점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잭 케루악의 광활하고 울퉁불퉁한 길 위에서, 로버트 프랭크의 원근법 시점조차 붕괴시켜 버린 자유로운 소실점 위에서, 나는 어느 길을 걷고 있는 걸까.

    

이 책들은 흰색 테이블보에 가지런히 차려진 정찬보다는 게걸스럽게 우적우적 씹어 먹어야 제 맛이 난다. 그래야 <길 위에서>의 그 짜릿한 속도감과 <미국인들>에서의 불편하지만 생생한 실상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때론 낯설고 어색하다. 기대하게도 하지만 또 그래서 허무하게 만드는 아주 괴팍한 녀석이다. 마음이 유독 요동쳤던 지난 가을, 여행지 내내 내 가방 안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책들이다. 그리고 다음 어느 여행지에서 문득 떠오를 책들이기도 하다. <길 위에서> 주인공 샐이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더 멀리까지 내 별을 쫓아가고 싶었다."

    

나 역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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