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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작 Mar 01. 2024

책 <골목 안 풍경 전집>, 김기찬

아련했던 시절의 풍경화


소설가 송영은 골목을 엄마의 자궁에 비유했다. 말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글쟁이 허세라 치부했지만 다 읽은 후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아가 그런 표현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우리들은 어렸을 때 숨바꼭질을 했고, 그때마다 어둡고 깜깜한 옷장이나 다락방 같은 곳으로 기를 쓰며 기어들어 갔던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깜깜하고 비좁은 옷장이나 다락방 속에 들어가 앉아 있노라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고 세상 모든 근심걱정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걸 느끼게 된다. (중략)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잘못 세상에 태어났다가 다시 자궁으로 돌아와서 비로소 맛보는 안도감과 안락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송영, 본문 p.51)


김기찬의 <골목 안 풍경전집>에 붙인 소설가의 소감이다. 김기찬은 서울의 골목길을 주제로 약 30여 년간 작업을 했으며 다섯 차례 개인전을 가진 사진가. 2005년 68세를 일기로 타계하기까지 그는 줄곧 골목에 천착했다.

 

그의 사진들은 거창하지 않다. 화려한 색채도, 서사적 풍경도, 멋들어진 기교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골목 사람들의 일상 풍경이 있을 뿐이다. 도시빈민이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릴 법한 '서민'들을 사진가 김기찬은 동정하거나 계급적 시각으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그저 그들과 그 골목을 따스하게 바라볼 뿐이다.


사실 도시 안에 자리 잡은 골목이라는 것에 대해 낭만적 정서를 가질 의무감은 없다. 어차피 인간의 개발행위로 인해 파생된 인공적 산물들이다. 하지만 계획적 개념의 직선도로와는 다르게, 의도하지 않게 생겨난 골목은 우리의 삶과 밀착했다. 집과 집, 고개와 고개를 연결하면서 최대한 지형지물에 순응했고 그 과정을 우리와 함께 성장했다. 인위적이면서 동시에 자연적인 산물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 정감을 느끼는 이유가 아닐까.

        

하지만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그 골목을 잃어버렸다.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산업화가 진행되어 온 서구와 달리 초고속으로 발전해 온 우리의 골목 상실 속도는 거침없었다. 휘황찬란한 수직 수평의 양적 팽창 속에 누추한 골목이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어느새 골목은 가난과 곤궁함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소통의 공간이자 화합적 기능을 하는 골목의 문화적 가치 역시 잊어버렸다. 아니, 그런 미사여구는 팍팍한 일상을 살아가는 골목 안 사람들에게 단지 공허한 현학뿐이었을 것이다. 저 멀리 보이는 신기루, 편리함과 풍요의 상징인 고층아파트와 대비되는, 그저 하루빨리 탈출해야만 하는 고단한 현실일 뿐이었다.

        

이제 기적처럼 우리는 그 신기루에 들어섰다. 높은 아파트를 가졌고 넓은 도로와 자동차를 가졌다. 깨끗한 음을 들려주는 휴대용 기기들을 가졌고, 외부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되는 방음창문을 가졌다. 동시에, 더럽고 비좁고 시끄럽고 참견받는 골목은 누가 볼 새라 서둘러 파묻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 원하는 것들을 가졌으니 행복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지금의 우리는? 자살률은 치솟아 선진국들 중 최고가 되었고, 주변에서는 온통 ‘힐링’ 타령이다. 기술발전에 환호할 때는 언제고 이젠 낡은 것들을 사는데 돈을 쓴다. 완벽한 독립을 보장받는 고요해진 공간을 박차고 나와 예전에는 듣지도 못한 ‘백색소음'이라는 것들을 찾아 나선다. 이제 우리는 다시 골목과 그 소음이 그리운 걸까.

        

"빈민가나 서민촌의 뒷골목은 언젠가 사라져야 할 낡은 무대인가. 풍요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그것은 다만 지난날 울며 겨자 먹기로 머물렀던 긴급피난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조만간 우리 모두는 풍요의 백성이 되어 그 공간을 한낱 박물관의 골동품쯤으로 무심히 바라볼 시대가 올 것인가.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비좁고 초라한 공간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이며, 그곳에서 마주쳤던 이웃들과 그 공간의 품속에 깊은 향수를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가장 자유롭고 허물없는 세계였던 것이다.” (송영, 본문 p.58)

        

최근에 불고 있는 단독주택 붐에 기대어 골목의 부활에 대한 기대감도 갖게 된다. 하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은 전 세계 최고의 아파트 거주율을 자랑한다. 단독주택을 짓는 방식 역시 골목의 시대와는 다르다. 대규모로 택지와 기반시설을 조성하고 그 구획된 부지 내에서 각자의 집들이 태어난다. 정교하게 자로 잰, 틀 안에서의 제한된 자유이자 애드립일 뿐이다. 자연발생적인 골목의 탄생은 더 이상 바랄 수 없게 됐다. 비관적이지만, 송영의 표현 중에 ‘긴급피난처’ 였을 확률이 크다는 얘기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다는 현실보다 볼 수 없을 거란 희망 없음이 더욱 아쉬움을 배가시키는지도 모른다. 존재조차 잊고 살았는데, 어느 날 문득 찾으려 하니 이미 기억 너머 사라져 버린 아련함일까. 우리의 어린 시절처럼, 골목길은 현재라는 시간과 영원한 작별을 고했다. 이제 우리는 옛 사진첩을 뒤적이며 그 기록들을 회상한다.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그 자취의 소중함에 눈을 뜬다. 평생에 걸친 사진가 김기찬의 작업이 짙은 그리움과 더불어 고마움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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