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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쫑작 Feb 12. 2024

이상한 나라의 더 이상한 화폐제도


아침에 호텔로비를 나섰다. 벨맨이 택시를 부르려고 저 멀리 대기 중인 기사에게 손짓을 한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호텔 앞에서 벨맨이 잡아주는 택시를 타면 시내까지 나가는데 무조건 10 꾹 (CUC) 이상이다. 아무래도 호텔에서 대기하는 택시기사들과 벨맨사이에 모종의 카르텔이 있는 것 같다. 거리에서 잡으면 그 정도는 아니다. 미터기가 없다 보니 부르는 게 값.


호텔 건너편에는 이런 카르텔에 속하지 않은 듯한 일반 택시들이 줄을 서있다. 그쪽으로 건너가자 기사들이 엄청 반가워하며 우르르 몰려온다. 선해 보이는 기사 한 명에게 얼마에 가겠냐고 물어봤다. 새까만 피부의 그는 하얀 치아를 만개하며 8꾹 달란다. 불과 몇 걸음, 길 하나 건넜을 뿐인데 2꾹 차이가 난다. 체감상 쿠바에서 2꾹이면 미국에서 얼추 20달러 비슷한 느낌이 난다.  

        

쿠바는 자국민들 사이에 통용되는 화폐와 외국관광객을 위한 통화가 다르다. 쿠바에 처음 오는 사람들이 멘붕에 빠지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이중화폐다. 쿠바에는 두 가지의 통화 단위가 있는데, ‘CUC’(‘쎄우쎄’ 또는 ‘꾹’으로 부름)와 ‘CUP’(‘쎄우뻬’ 또는 ‘꿉’)이 그것이다. 보통 ‘꾹’이 외국인용, ‘꿉’이 내국인용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알고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둘 중 한 가지 화폐만 받는 곳이 있고 둘 다 받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즉, 외국인이라고 무조건 ‘꾹’만 사용하라는 법도 없고 쿠바인이라고 ‘꿉’만 쓰라는 법도 없다는 얘기다.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냐고 할 수 있지만 원래 쿠바 화폐제도 자체가 이상한 거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돈에‘꾹’이나 ‘꿉’이라고 쓰여있지도 않다는 거다. 그냥 둘 다 똑같이 ‘Peso (뻬소)’라고 쓰여있다. 일부러 외국인들 골탕 먹이려고 하지 않는 이상 이렇게 헷갈리게 화폐제도를 만들었을 리 없다.


암튼 ‘꾹’과 ‘꿉’  두 화폐의 가치가 별 차이 없다면 뭐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놀라운 건 둘의 가치가 무려 26배나 차이 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꾹’이 훨씬 비싼 돈이다. 이것저것 떼고 계산하기 쉽게 따지면 ‘1꾹 = 24꿉’ 정도 된다. 그래서 절대 헷갈리면 안 된다.


사실 ‘꾹’은 쿠바정부가 미국 달러에 대응해서 만들어낸 화폐단위다. 한마디로 미국한테 꿀리지 않겠다는 소리다. 그러다 보니 달러 대비 환전율이 1:1에 가깝다. 정확히는 달러:꾹 = 1:0.84인데, 수시로 바뀐다고는 하지만 거의 이 정도 비율로 일정하다. 그래서 미국 달러보다는 유로화나 캐나다 달러 환율이 더 좋다. 어쨌든 화폐단위가 이렇다 보니 관광객들은 가끔 사기를 당하기도 한다.


나 역시 처음 쿠바에 왔을 때 택시기사에게 두어 번 당했다. 택시요금으로 20꾹을 내고 5 ‘꾹’을 거스름돈으로 받아야 하는데 5 ‘꿉’을 받은 것이다. 택시기사도 실수했을 거라 좋게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쿠바 사람들한테 얘기를 들으니 그들이 가끔 쓰는 수법이라며 깔깔거린다. 일단 어리버리한 외국인이 타면 잔돈을 ‘꿉’으로 줘봐서, 별소리 없이 받으면 땡잡은 거고 아니라고 하면 아 미안! 하며 제대로 주면 그뿐이라는 것. 쿠바가 강력사건은 많지 않지만 이런 잡범들은 꽤 있다.

        

그럼 이렇게 헷갈리는 걸 어떻게 구분하느냐. 두 번째 쿠바에 갔을 때 비로소 확실하게 구분하는 방법을 알게 됐는데, 알고 보니 엄청 간단했다. 지폐의 경우 사람 얼굴이 들어있으면 ‘꿉’, 동상이나 탑 등 건축물이 있으면  ‘꾹’, 이렇게 기억하면 정확하다. 동전의 경우에는 여러 종류가 많은데 현재 유통되는 ‘꿉’은 시커먼 거 한두 개 밖에 없으니, 은색 동전은 모두 ‘꾹’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특히 체 게바라 지폐로 장난치는 쿠바사람들이 있다. 사람이니 ‘꾹’이 아닌 ‘꿉’, 즉 3 꿉(뻬소) 짜리 지폐에 도안되어 있다. 체 게바라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이걸 3 꾹에 파는 사람들이 있고 실제로 그걸 사는 관광객들이 있다. 한국 가치로 불과 150원 정도 하는 걸 3,600원에 파는 거다. 나도 여러 번이나 사겠냐고 물어오는 쿠바노들이 있었다. 그럴 때는 그냥 ‘야, 나 알아’하고 웃어 보이면 자기들도 같이 웃는다. 사기는 사기지만 좀 귀엽다고나 할까.


참고로 쿠바에서 미국계 신용카드는 안되지만 미국계 이외 비자 마스터 신용카드는 결제가 된다. 한 번은 우리의 부산쯤 되는 산티아고 데 쿠바 외곽의 깡촌 주유소에서 삼성마스터카드로 계산해 봤는데 결제가 됐다. 그 시골에서 삼성카드가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반갑던지. 생각해 보라. 현금이 거의 바닥나고 환전할 곳도 없는, 닭들이 날아다니는 쿠바 시골에서 조마조마하며 삼성카드를 긁었는데 결제가 될 때의 그 환희를.


<쿠바 화폐. 출처: banknote.com>



지금은 이중통화제도가 폐지되었다. 2021년 이후 '꾹' 단위를 없애고 '꿉'으로 통일시킨 것이다. 물론 한 나라의 화폐제도라는 것이 한순간에 일사불란하게 바뀌지는 않는다. 상당수가 지하경제로 흘러 들어가고 한동안 다른 방식으로 통용된다.


또한 이로 인해 쿠바경제는 훨씬 더 심각하게 타격을 입었다. 생각해 보라. 국민들 입장에서는 1/24 수준의 저렴한 가격으로 공산품들을 해외로부터 공급받다가 갑자기 그 가격이 24배 폭등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2022년에는 물가가 무려 800%나 뛰었다.


이와 함께 의료, 관광 등 주로 대면을 통한 서비스 산업 기반으로 인해 코로나에 직격탄을 맞은 쿠바경제는 지금도 휘청이고 있다. 2021년, 공산당 1인 독재체제 국가에서는 보기 드물게 반정부 시위가 쿠바전역에서 일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2024년 대선에서는 대쿠바 강경파인 트럼프 당선이 유력해 보인다. 이래저래 쿠바의 앞날은 순탄치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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