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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리아 Jan 27. 2022

아버지라는 역할극

열 살 때 기억하던 마흔의 아버지는 완전한 어른이었다. 당시 우리 집에서는 가장에 대한 권위가 있어서, 아버지의 기분대로 집안 분위기가 흘러갔다. 당신이 잘못해도 소리치는 것은 당신이었고, 나머지 식구들도 거기에 맞췄다. 그리고 아버지는 동네에서도 흔히 방귀 좀 뀐다는 양반이었다. 동네 토박이에 통장도 하고 있어서 발도 넓고 오지랖도 넓었다. 남 눈치 보거나 조심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분쟁이 일어난 곳엔 검사, 변호사, 판사의 역할까지 다해서 문제를 해결했다. 술자리에선 목소리가 큰 편이었고, 분위기를 이끌려는 타입이었다. 덕분에 엄마는 동네 부끄럽다는 말을 자주 했다.      


나는 아버지와 반대로 겁도 많고 부끄럼도 많았다. 한 번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교실 유리창에 금이 가게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혼나는 게 무서워서 집에 와서 아버지께 말했다. 그 길로 아버지가 나를 차에 태워 다시 학교로 갔다. 선생님을 찾아가 호탕하게 조만간 사람을 불러 유리를 갈겠다고 하며 언제 술이나 한잔하자고 말했다. 선생님도 아버지의 분위기에 이끌려 그러자고 했다. 그 모습은 내가 속할 수 없는 어른의 세계였다. 아버지의 당당하고 거침없는 태도가 어린 나에게는 참 대단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후에 선생님은 그 일로 나를 혼내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들이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란 존재의 모습이었다. 상황에 따라 큰소리치기도 하고, 능청스럽게 웃으며 무마하기도 하고, 어떤 일이든 상황에 맞게 다 처리하는 모습. 그래서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아버지처럼 목청도 커지고 동네 사람들과 악다구니 다툼도 하는 사람이 될 거로 생각했다.   

   

한 세대가 흘러 지금 나도 아들을 가진 마흔 살의 아버지가 되었다. 하지만 나에겐 아버지같이 억척스러운 모습이 없다. 살아온 시대와 삶이 다르기 때문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나보다 훨씬 일찍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고, 가정도 빨리 이루었다. 삶의 밀도가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어른이 된 걸까?     

 

아들을 키우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스무 살 이후로 더 철이 든 것 같지 않은데, 어쩌면 스물의 정신을 가진 내가 마흔의 아빠가 되어 ‘아빠’인 척을 하는 것 같다고. ‘아빠’라는 역할극을 하는 것이라고. 난 아직 철들지 않았는데, 아들 앞에선 못 하는 것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고, 모든 일을 해결하는 어른인 척하는 모습을 보인다. 스물의 나를 숨기고 내가 생각하던 어른과 아버지라는 역할을 내 아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내 아버지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처음 해 보는 것도 아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능청스럽게 하기. 원래부터 잘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역할극을 아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원래부터 아버지였던 척하기.      

스무 살 때 면허를 따고, 아버지 차로 연수를 한 적이 있다. 운전이 미숙하여 오르막에서 뒤차를 살짝 박게 되었다. 나는 이를 잘 인지하지 못하고 출발했는데, 뒤에서 난리가 났다. 차를 멈추자 뒤차의 차주가 삿대질하며 우리 쪽으로 왔다. 차에서 내려 나는 우물쭈물 한마디도 못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그 화난 차주에게 허리를 굽히며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했다. 우리 애가 운전을 처음 해봐서 그렇다고, 이해해달라고 했다. 다행히 차에 손상은 없었다. 그 차주가 차를 박고 그리 가면 어떡하냐고 화가 누그러진 투로 말을 했다. 아버지는 또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차주가 조심해서 운전하라며 돌아갔다. 초등학교 3학년 때처럼 잘못은 내가 했는데, 해결은 아버지가 했다. 그때도 그런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어떻게 이런 상황들을 잘 처리할까? 여러 번 해 본 일이었을까? 차를 타고 오면서 그 질문을 하진 않았다.      


만약 어린 나와 아버지가 산에서 등산하다가 곰을 만났다면, 그때도 아버지는 그 상황을 잘 해결 할 수 있을까?      

방법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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