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걱정하지 마. 넌 지금까지도 늘 글을 써 왔고 앞으로도 쓸 거야. 네가 할 일은 오직 진실한 문장을 딱 한 줄만 쓰는 거야.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한 문장을 써봐." -헤밍웨이
이 말을 행운의 부적으로 새기고 다니는 작가라면 우리는 그의 진실성은 믿어줄 수 있지 않을까?
영혼이 지치는 날이면 류시화 작가님의 책을 꺼내 들게 된다. 그는 투명한 진실됨으로 내 마음의 힘과 색을 빼주는 특별한 작가니까. 다시금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구절들과 생각들을 글로 남기고 싶다.
Nothing special. 큰일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 강박적인 생각을 내려놓을 때 마음과 가슴이 열린다. 우리는 영원하지 않은 문제들에 너무 쉽게 큰 힘을 부여하고, 그것과 싸우느라 삶의 아름다움에 애정을 가질 여유가 없다. 영적인 삶의 정의는 '가슴을 여는 것' 혹은 '받아들임'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크고 작은 일 모두에는 삶의 아름다움이 있다. 다만 마음이 어지러운 날이면 그 아름다움을 쉽사리 찾기 어려울 뿐이다. 코로나라서, 사는 게 바빠서, 사랑하는 이와 이별해서. 어쩌면 이런저런 이유들로 아름다움을 찾는 일을 소홀히 했다. 영원하지도 않을 문제들에 내 마음을 쏟은 것이다.
행복한 일이든 불행한 일이든 이것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그것을 그렇게 큰일로 만들지 말라.'
어떤 일이든 삶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님을 안다. 그럼에도 나의 행복과 불행을 큰일로 만들어서 자주 두려웠고 아쉬웠으며, 많이 아파했다. 큰일은 없다.
마음속에서 하는 말을 조심하라는 격언이 있다.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해도 자기 자신이 듣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단어는 무의식 속에서 정신을 부패시키고, 어떤 단어는 기도처럼 마음의 이랑에 떨어져 희망과 의지를 발효시킨다.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말은 예쁘고 둥근 단어들을 골라 신중하게 말하려 애쓰면서도,
왜 마음속에서 하는 말은 조심하지 않았을까? 정작 나 자신이 듣고 있다는 것을 잊었다.
'내 잘못이야. 후회해. 사실 부끄러워.' 하는 말들. 나도 몰래 듣고는 그 말에 또 한 번 아팠음을.
앞으로는 나에게도 따뜻하고 친절하게 말하고 싶다. 마음속에서 하는 말도 신중하게 하고 싶다.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상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서로에게 친절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여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것만큼 위험한 말이 있을까? 모든 이를 나는 알지 못한다. 아픔과 상처를 알 길은 없다. 그러니까 늘 친절해야 하고, 판단하면 안 된다. 어린 아이나 나이가 많은 어르신이라고 다르지 않다. 만나는 모든 이에게 , 그리고 나 자신에게 따뜻하고 친절하고 싶다.
만약 우리가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다면, 전체 이야기를 안다면, 지금의 막힌 길이 언젠가는 선물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게 될까? 그것이 삶의 비밀이라는 것을.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지나간 길이 아니라 지금 다가오는 길이다.
삶이 때로 우리의 계획과는 다른 길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길이 우리 가슴이 원하는 길이다. 파도는 그냥 치지 않는다. 어떤 파도는 축복이다. 머리로는 이 방식을 이해할 수 없으나 가슴은 안다.
사는 게 어려운 이유는 삶이 내 계획처럼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삶이 사실은 가슴이 원하는 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면, 지금 막힌 길이 결국은 선물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우린 많이 아파하고 어려워했음을 후회하게 될 일이다.
무관심하게 지나쳐버린 삶의 모든 순간은 정말이지 선물이었는지 모른다.
우린 신에게, 삶에게 묻곤 한다. '왜 나에게는 이것밖에 주지 않는 거지? ' 그러나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답한다. '이것만이 너를 네가 원하는 것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과 장면들이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에서부터 삶은 빛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가장 잘 말해 주는 것은 나의 주의나 주장이 아니라 내가 은연중에 행하는 행동, 혹은 혼자 있을 때 하는 행위이다. 영혼과 의식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행하는 작고 사소한 행동들이 내 몸의 리듬을 결정하고, 마음의 세계를 드러내 보이며, 의식을 특정한 차원과 연결시킨다.
은연중에 사적으로 만난 사람과 공적으로 만난 사람을 구분하는 행동, 혹은 혼자 있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 더 친절하게 대할 수 있음에도 쉽게 볼까 봐, 혹은 상처를 받게 될까 봐 그러지 못하고 거리를 두었던 행위들. 그렇게 나쁜 의도가 아님에도 따뜻하지는 못했던 작고 사소한 행동들이 내 몸의 리듬을 결정해왔다. 그럼 나는 그런 사람인가? 그렇지는 않기에 여태껏 관계가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과 당신이 한 행동을 잊지만, 당신이 그들에게 어떻게 느끼게 했는가는 잊지 않는다.
내가 한 행동들은 사람들을 어떻게 느끼게 했는가?
저 사람은 나와 아주 친밀한 사이는 되고 싶지 않구나. 하는 느낌일 텐데. 나는 그걸 원했을까?
그럼 나는 그들이 어떻게 느끼기를 원하는가?
어느 명상 센터에서는 이렇게 기도한다. '내가 가능한 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갖기를. 만약 내가 이 순간에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친절하기를. 만약 내가 친절할 수 없다면 판단하지 않기를. 만약 내가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면 해를 끼치지 않기를. 그리고 만약 내가 해를 끼치지 않을 수 없다면 가능한 한 최소한의 해를 끼치기를. '
위의 기도문은 앞으로 내가 아침마다 명상을 할 기도문이다.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연민의 마음이 전해지기를 원한다.
모든 일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며, 모든 만남에는 의미가 있다. 누구도 우리의 삶에 우연히 나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내 삶에 왔다가 금방 떠나고 누군가는 오래 곁에 머물지만, 그들 모두 내 가슴에 크고 작은 자국을 남겨 나는 어느덧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당신이 내 삶에 나타나 준 것에 감사한다. 그것이 이유가 있는 만남이든, 한 계절 동안의 만남이든, 생애를 관통하는 만남이든.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품고 살기를 다짐하는,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준 모든 이들과 순간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누군가는 나를 떠나가기도 했고, 내가 그들을 떠나기도 했으나 그들이 내 삶에 나타나 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 계절, 그 만남, 그리고 지금도 삶에 있는 그들은 내게 모두 의미가 있었으며 우연이 아니니까. 남은 계절, 생애에도 그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물론 작가님께도 감사하고 싶다.
내일은 어떤 선물이 있을까. 침대 밑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물들을 세다가 잠이 들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