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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비 Mar 11. 2018

[실록읽기] 조선시대의 단골

예나 지금이나 관료가 된다는 것은

  저는 스타벅스를 아주 좋아합니다. 일명 스타벅스 죽순이. 일단 집에서 무척 가깝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이고, 다음으론 커피가 맛있습니다. 묵직한 바디감의 커피를 좋아해서 스타벅스 커피가 입맛에 맞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 직원들이 무척 친절합니다. 그래서 스타벅스에 상주하고 있는데요, 제가 주문하는 메뉴는 늘 정해져있습니다. 아메리카노 아니면 오늘의 커피와 간단한 음식, 그리고 머그잔에 얼음 가득. 얼음 가득 담은 머그잔은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때 부탁을 드리는데, 자주(아니.. 매일..^^;) 오다 보니 직원분들이 말하지 않아도 그냥 머그잔과 얼음을 준비해주시죠.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집 앞 스타벅스에 와서 커피와 베이글을 주문했는데, 알아서 챙겨주십니다. 이런 서비스가 좋아서 저는 또 스타벅스를 찾습니다. 단골이라는 게 자주 찾는다는 것 말고도, 인간 간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챙겨줄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겠지요. 

  단골이라는 단어는 여러 의미가 있는데요, 국어사전에는 '늘 정하여 놓고 거래를 하는 곳'이라고 풀이를 하고 있어요. 민속신앙에서는 '호남지역에서 혈통에 따라 세습되는 무당'을 이릅니다. 그런데 무당과 신앙 관계를 맺은 신도를 '단골집'이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과 자주 만났던(거래를 했던) 신도를 '단골집'이라고 부른 것이죠. 그게 점점 일반사회에 통용되어서 국어사전에서 말하는 '단골'의 의미가 된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단골이라는 말이 조선시대, 그것도 관리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던 말이었습니다. 바로 '단골리(吏)'라는 말인데요, 단골 서리라는 뜻입니다. 단골도 알겠고, 서리도 알겠는데, '단골서리'라뇨? 혹시 무당이 서리였나요?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단골리는 조선시대 양반 관료가 단골로 관청의 일을 부탁여 시키는 이조 또는 병조의 서리를 의미합니다.  


                                                                                             

단골리(丹骨吏) : 조선시대 양반 관료가 단골로 관청의 일을 부탁하여 시키는 이조(吏曹) 또는 병조(兵曹)의 서리를 의미함.                                                                                                                                                                                          

그런데 이 단골리는 공식 문서에 찾아볼 수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丹骨'을 검색해보면 한 건도 없습니다.                                

                  


                                                                                                  

그럼 한 글로 검색해볼까요?                                    


              

                                                                                                      

  오 3건이 나와요. 그런데 막상 들어가서 읽어보면, 본문이 아니라 본문에 나온 단어를 설명하기 위한 각주에 나오지요. 그럼 어떤 단어에 붙은 각주일까요? 바로 '당참(堂參)'이라는 단어입니다. 


  당참이란 관료가 발령을 받거나 다른 고을로 옮길 때 의정부나 자신의 직에 해당하는 전조, 그러니까 이조나 병조에 가서 인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종의 신고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고식 때 당참채(債) 혹은 당참전(堂參錢)이라고 해서 단골서리에게 돈을 주어야 했습니다. 관직에 오를 때 내는 수수료와 같은 것이죠. 예나 지금이나 관직에 오르려면 돈이 많이 필요한가 봅니다. -_-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지만, 이런 가치는 변하면 좋겠네요.

  아, 그런데 이런 돈을 받는 단골서리는 누구이며, 왜 돈을 받아 갈까요? 

  단골서리는 정말 단골을 관리하듯 조선시대 관리들을 관리했어요(오, 의도치 않은 라임!). 그리고 관리들, 특히 지방 수령들은 서리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어요. 그 이유는 일단, 지역적 이유 때문이에요. 지금이야 서울과 부산이 비행기로 1시간, KTX로는 3시간이면 충분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보름에서 한 달은 꼬박 걸리는 거리였지요. 그렇기 때문에 소식도 엄청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인터넷이 있었다면 어쩌면 단골리는 없었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도 지방 수령들은 서울로 가거나 서울과 가깝거나, 혹은 중요 요직으로 발령받고 싶어 했어요. 근데 그 자리가 언제 나는지는 서울과 멀리 떨어진 지역에 앉아서는 알 수가 없지요. 알게 된다 하더라도 이미 발령이 난 뒤에나 알게 되는 경우도 많구요. 그렇다 보니, 지방 수령들은 서울에 똘똘한 끄나풀이 필요했고, 그런 일을 해줄 적합한 사람이 바로 서리였던 것이죠. 특히 이조와 병조의 경우는 조선시대 문무관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던 곳이어서 이조와 병조에 소속된 서리들도 영향력이 컸습니다. 이조와 병조의 영향력 있는 서리와 친해진다면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가기 위한 준비를 좀 수월하게 할 수 있겠죠?

  조정의 서리와 지방 수령이 친하게 지냈던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재직기간 계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가 퇴사할 때 제일 먼저 고려하는 게 뭐죠? 바로 실업급여입니다. 6개월 이상 근무하지 않으면 실업급여 자체를 신청할 수 없잖아요? 그리고 근무한 일수와 월급에 따라 급여액도 달라지니 하루라도 빠지지 않았을까 꼼꼼하게 계산하죠.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조선시대에는 실업급여가 아니라 승진이나 승품과 관련이 있었어요. 관리가 승진을 하기 위해서 채워야 하는 일수를 계산하는 게 아주 복잡하고 다양했기 때문에 일반 관리들은 이것을 계산하기 어려웠습니다. 반면에 밥 먹고 이런 일만 하는 서리들에겐 아주 껌이었죠.  

  단골서리들이 지방 수령들에게 이렇게 정보를 흘립니다. "조만간 어느 지역에 수령 자리가 날 건데, 지금 근무 일수가 며칠 모자라니 그걸 이렇게 저렇게 채우시고, 그리고 나서 누구를 찾아뵙고....  이렇게 하면 이번에 원하시는 자리에 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하고 말이죠. 

  지방 수령들이 이런 이유들 때문에 친하게 지내는 서리를 두고 관직에 관한 자문을 했고, 이들을 단골리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럼 단골리들은 얻는 게 뭘까요? 

  조선시대 관리들의 녹봉 지급 규정을 담고 있는 법은 [경국대전]입니다. 그런데 [경국대전]에는 서리들에 대한 녹봉 지급 규정이 없었습니다.(띠로리...) 그렇습니다. 서리들은 관료들의 단골리가 되어 그들이 원하는 정보를 주는 대신에 돈을 받은 것이죠. 물론 이것도 직접 돈을 준 건 아니고, 관료 앞으로 나온 녹봉을 서리들이 대신 받았습니다. 관료들의 월급은 광흥창에서 정해진 날짜에 나눠줬는데, 이때 서리들이 '내가 아무개 관리의 단골리다'라는 걸 밝히고 녹봉을 대신 받아 갔습니다. 받은 녹봉으로 자신이 단골리를 해주면서 필요한 경비를 덜어내고, 나머지는 자산관리를 해줬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단골리의 서비스가 좋죠? 그런데 가끔 그 녹봉을 횡령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네요^^; 

  그렇지만 이것만으로 서리들의 경제난이 해결되지 않지요.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서리들이 공금횡령 등 경제적 부정행위나 범죄에 관련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그 이유는 일을 시키고도 돈을 주지 않는 행정체제의 문제 때문입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온 미봉책이 바로 '당참전'입니다. 조선 초기부터 암묵적으로 시행되다가, 19세기에는 법적으로 공식화했습니다.  그럼 서리들은 당참채로 얼마를 받았을까요?

  이에 관해서는 18세기 사람 황윤석이 쓴 [이재난고]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황윤석은 1779년 8월에 목천 현감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당시 황윤석의 단골서리는 장도흥과 장효언 부자였습니다. 장도흥 부자는 자신과 단골 관계에 있던 황윤석에게 당참전을 받기 위해서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충청도까지 말을 끌고 내려왔고, 황윤석은 이들 부자에게 전례에 따라 25냥을 주었습니다. 

  18세기 말 25냥은 어느 정도의 금액일까요? 1769년 당시 서울에서 1간당 초가집 가격은 10냥, 기와집 가격은 20냥이었다고 합니다. 25냥이면 서울에서 초가집 2칸은 살 수 있었고, 기와집도 1칸을 사고 5냥이 남는 돈이었습니다. 눈이 내려도 받으러 갈 만한 돈이겠습니다. 

  그런데 황윤석은 25냥 중에서 14냥은 상인들에게서 거두고, 11냥은 관원에서 부담했다고 합니다. 즉 관료가 내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은 상인과 그 지역 관청에서 부담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정말, 예나 지금이나 정경유착..  결국 이건 전부 그 지역 백성들에게 부담이 전가되는 거죠. 결국 체제의 문제를 돌려 막기 하는 거죠.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건, 기분 탓이겠죠?


  이 외에도 관리와 단골리간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는 참 많은데,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계속 쓰다간 화가 날 것 같아서ㅎ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이번에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참고로 조선시대의 서리는 아전이라고도 불렸는데, 서울에 있는 아전을 경아전이라 불렀고, 이들은 조정의 각사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방 관사에서 근무하는 아전은 외아전이라고, 향리를 일컫는 말입니다. 

*글에서 등장하는 서리는 경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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