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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비 Dec 06. 2019

한 치의 오차를 매일 만드는 사람

숫자 없는 세상에 살고 싶어요.

회사의 매입매출의 과정을 매우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매입한 물건에 대금을 지불하고, 우리가 판매한 물건에 돈을 받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실제로는 조금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물건을 받는 즉시 대금을 지불하는 것도 아니고, 또 우리가 납품을 했다고 해서 바로 수금을 하는 것도 아니다. 대개 한 달 동안 거래 내역을 잘 정리해뒀다가 월말에 세금계산서를 발행하고, 그 계산서에 따라 다음 달에 돈을 지불하고, 입금을 받는다. 그러니까 한 물건에 대한 거래 완료는 약 2개월에 걸쳐서 일어난다. 어떨 땐 3개월, 4개월. 그런데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그때그때 들어온 것 잘 정리해서 다 더하고, 상대에게 알려주고 수금이 되었는지 확인만 하면 되는 것. 내가 또 정리라면 또 기가 막히게 하니까 처음엔 이게 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면서 잊고 있던 나의 취약점이 떠올랐으니.. 나의 취약점이란 바로 숫자와 손글씨다.


숫자는 내게 너무나도 어려운 존재다. 백만 단위로 넘어가기 시작하면 겁부터 난다. 물론 숫자만큼 정확한 것이 없기 때문에 숫자를 사용해서 논증하는 걸 좋아하지만, 그건 전체 문서에 숫자가 20% 미만일 때나 하는 소리다. 문서에 숫자와 기호들이 넘실거릴 때면 약간의 두통과 함께 멀미 증세가 난다. 글에 도표와 숫자가 3장 이상 나오면 그때부턴 몸이 아프기 시작한다. 이런 내가 학부 때는 경제학과 수업을 네 학기나 들었고, 조선 후기 상업 정책을 전공으로 삼으려 했다는 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공부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는 있었지만, 그때의 나는 나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쳤던 것 같다. 그 많은 경제학, 경제사 관련 책을 읽으면서 정말 미춰~버리는 줄 알았다. (그래도 그 책들 꾸역꾸역 읽어낸 20대, 30대의 나 칭찬해!) 논문을 쓰면서도 지도 교수님한테 보양제 먹듯 욕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상업사를 하겠다는 사람이 숫자도 제대로 못 읽고, 숫자를 더하지도 못하고, 아니 입력도 제대로 못하는데, 이거 논문 쓸 수 있겠어요?'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교수님 목소리가 귀에 쩌렁쩌렁 울린다. 저것보다 더 심한 말도 들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니까. 굳이 쓰지 않겠다. 써봤자 기분만 나쁘지 뭐. (또르르.. 눈물 좀 닦고). 사실 상업사라고 해도 방점이 '상업'이 아니라 '사'에 찍히는 거라 어떻게든 숫자는 최대한 요리조리 피해 논문은 썼다. 하지만 거기까지. 학교에 계속 남았더라면 아마 가방끈을 늘리기도 전에 내 생명줄은 소멸했을지도 모른다(물론 숫자 때문만은 아니지만). 암튼 지금 생각해도 학교를 떠난 건 나를 위해서도, 학계를 위해서도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매번 틀린 숫자로 논문을 써대면, 그걸 읽는 선생님들은 얼마나 화가 나시겠나. 그리고 화내는 선생님들을 보며 나는 또 얼마나 쪼그라들겠는가. 그렇게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학교를 떠났건만, 이렇게 땋! 만날 줄이야.


회사의 매입 매출을 잘 파악하는 게 회계의 기본이다. 회계는 숫자로 시작해서 숫자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치의 오차가 처참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게 회계(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회계 프로그램이 워낙 잘 되어 있어 초기값, 수량과 단가만 잘 써넣으면 세액까지 자동으로 계산된다. 이렇게나 편리하게 바뀌었는데, 이게 뭐가 어렵냐는데, 난 이 초기값 입력에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거다. 예를 들어 '387'이라는 숫자가 있으면 '삼백칠십팔'로 읽거나 '200'을 '20'으로 입력하는 것처럼 숫자 하나를 빼먹던가. 한치의 오차를 매일 만드는 사람. 참으로 회계일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로다. 


그런데 숫자를 잘못 읽는 건 내 눈이 미끄러져서 그렇다고 하겠으나, 숫자를 하나 빼먹는 건 한 20% 정도 억울한 마음이 든다. 왜냐하면, 내 자리의 키보드가 너무 구리기 안 좋기 때문이다. 새로 장만한 키보드인데, 잘 안 눌러진다(반성해라 LG!!). 특히 숫자 0이 말이다. 그래서 툭하면 0을 하나씩 빼먹고 쓴다. 이건 뭐 부가가치세도 아니고, 매출을 90%나 까먹다니. 욕먹을 만하지만, 억울하다. 숫자를 잘못 적는 건 내 잘못이라 하더라도, 0이 빠지는 건 너무 억울하단 말이다(또 반성해라 LG!!). 이 키보드를 쓸 때마다 스트레스가 1밀리씩 쌓이는 기분이다(지금 이 글도 그 키보드로 쓰는 중인데, 쓰다가 욕을 몇 번을 삼켰는지 모르겠다). 눈도 미끄러져, 손도 미끄러져, 매번 숫자 입력이 틀리니 사장님은 새로 사줘도 일 제대로 못하냐고 구박하시고(사장님 새로 사주세... 아, 아, 아닙니다). 숫자를 입력할 때마다 혹시나 또 틀리는 건 아닌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도 몇 달 키보드에 익숙해지고 나니 0을 빼먹는 실수는 거의 줄었다(안 한다는 게 아니다).


거래처에서 명세서가 오면 장부에 적고, 엑셀 파일에도 기록을 해야 하는데, 이 간단한 두 단계를 수행하는 데에 시간이 꽤 든다. 혹시나 틀리지 않을까 몇 번씩 확인을 하기 때문이다. 명세서에 적힌 숫자를 손으로 짚어서 확인하고, 소리 내어서 읽고, 그런 다음 장부에 쓰면서 또 읽고. 다 쓰고 나서는 또 명세서를 바짝 옆에 붙여 확인하고. 숫자가 틀린 곳이 없으면 이제 엑셀에 입력할 차례. 엑셀에 입력할 땐 명세서와 장부를 같이 비교해서 본다. 셋 다 맞았으면 끝. 그렇게 온 정신을 집중해서 쓰고 입력하고 나면 정말 어깨가 뻐근하다. 그런데,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기록했으면서도 월말 정산 때 숫자가 틀리는 걸 보면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런 이유로 월말, 월초가 되면 정말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다. 월말이 되면 거래명세표 상의 금액을 합계 내서 매출금을 정산해서 세금계산서를 발행해야 하는데, 정말 죽을 맛이다. 거래처가 한두 곳도 아니니, 확인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져서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지금까지 빼먹고 안 쓴 건 없는지, 숫자를 잘못 적은 건 없는지, 합계금은 맞는지, 세금계산서 발행할 때 제대로 금액은 넣었는지, 거래업체의 사업자번호는 제대로 썼는지, 발행일자는 제대로 적었는지, 계산서 발행 후 장부와 엑셀에는 맞게 기입했는지. 매입금도 마찬가지다. 거래처에서 보내온 내역이 우리 장부와 맞는지 다 맞춰봐야 한다. 그래서 계산서를 발행해야 할 때가 다가오면 회사를 그만둘까라는 고민을 진지하게 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차라리 실수 한 번 하게 해 주세요'라고. 내가 실수를 할 것 같은데, 아직 안 하고 있다는 게 굉장히 불안하다.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뭔가 일어날 일인데 계속 유예를 해서 막 잘못이 점점 커지고 있는 기분, 거짓말이 거짓말을 불러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말이다. 왜 나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건지.


매월초, 월말마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어쩌면 너무 잘하려고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실수를 안 하고 싶으니 더 강박적으로 확인을 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다. 실수하면 어때라고 생각하면 좋겠지만, 내 돈도 아니고,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한 사람들의 수고를 내 실수로 헛일로 만들어버리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더 큰 것 같다. 물론 실수로 잘못 작성한 장부는 수정하면 되고, 잃어버린 거래명세서는 뒤지면 어디선가 찾게 되고, 잘못 발행한 세금계산서는 수정하면 된다. 어떻게 해서든 수정하면 된다. 그리고 국세청도 그렇게 야박하거나 야비한 곳이 아니다(그러나 약간 불편한 건 사실). 그렇지만 사장님의 잔소리는 야박하기 그지없다. 나만큼이나 사장님도 계산서 발행시기에 (나와는 다른 이유로) 무척 예민하시기 때문에 평소 잔소리 X100이다. 그래서 실수하면 나도 피곤하고 기분 나쁘고, 또 계산서를 발행받은 거래처도 피곤하고 귀찮아진다. 특히 중요한 거래처일수록 실수를 만들면 안 된다(고 사장님이 그러셨다). 그런 이유로 실수를 안 하려고 한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큰 실수는 없었다. 소소하게 명세서 몇 장 빼먹은 정도.. 물론 오지게 욕먹고, 거래처에도 사과 전화했지만. 아직 0을 빼먹거나 더하거나 한 적은 없다. 그래서 지금 내 불안은 최고조에 달해있고, 이 글을 쓰는 기간이 월초라 매일 세금계산서를 발행 중이고, 하루하루 정신줄을 놓을까 봐 조마조마하다. 대개 5일 정도가 되면 웬만한 세금계산서 발행이 끝나고, 웬만한 곳은 거의 다 발행이 끝난다. 근데 이번 달은 아직 몇 곳의 정산이 다 끝나지 않아서 세금계산서 발행을 못하고 있다. 그것도 사장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빅 3 거래처. 주말을 홀가분하게 보내고 싶었는데 그른 듯하다. 월요일에 와서 실수 없이 처리할 수 있도록 주말에는 심신의 안정을 취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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