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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모츄 Feb 13. 2024

감사나 잘 하자

마가복음 14 : 22~3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는데 예수께서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 주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는 잔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 모두 받아 마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내 피, 곧 언약의 피다.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한다. 내가 하나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시는 그날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찬송을 부른 뒤 올리브 산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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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의 그 밤은 공교롭게도 유월절의 그 밤이다. 이집트 탈출기의 마지막 재앙, 모든 장자들이 죽음에 넘겨졌던 그 밤이다. 그 밤의 재앙(심판)은 양의 피를 문과 문기둥에 바른 이들에게만 비껴갔다. 그 비껴감을 유월(넘어감)이라 표현했고, 그래서 유월절이다. 그날, 양(lamb)의 죽음이 표식이 되어 그들의 생명을 보존케 했다. 그 밤은 심판인 동시에 구원이고, 재앙이자 축복이다. 누구의 말에 기울이고 따랐느냐에 따라 희비가 갈린다. 


지금 예수께선 예전처럼 한 민족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한 피의 표식을 위해, 자신의 생명으로 죽음의 제사를 드리려 하신다. 그것이 또한 자기를 보낸 성부의 뜻이다. 그런데 온 세상 죄를 지고 대신 죽는다는 것은 온 세상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것이 전제된다. 예수는 "없다" 하는 이들을 위해 오지 않았다. 아프지 않다 하는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없다고 하신 예수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도 말하신 예수다. 요한복음은 아예 세상이 가운데 있지 않고 어둠 가운데 있어 빛이신 그분알아보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흥분한 무리들에게 "내가 생명의 떡이다" 말씀하신 예수는 유월절의 그 밤에도 제자들에게 같은 말씀을 하신다. "이것(유월절의 빵)은 내 몸이다" 유월절기를 지키며 나누어 먹었던 누룩없는 빵. 그것을 자기 몸에 비유하신다. 이 유월절에 바쳐질 새로운 제물은 예수 자신이며, 이로서 사람들은 참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유월절의 포도주를 들어 "이것은 내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한다. 이 언약은 새로운 언약이다. 모세가 살아있을 때 이스라엘과 맺으셨던 옛 언약 - 시내산 언약이 파기되고, 갱신되고, 강화된 사건이다. 그러나 이 언약의 혜택은 아직 이 땅에 온전히 임하지 않았다. 예수의 이어지는 말 - "내가 하나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시는 그날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 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 육신의 생명이 아닌 영적인 참 생명을 얻고 위에 계신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되고, 성령의 내밀한 음성과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게 되며, 예수의 이름으로 좁은 길을 걷기에 필요한 무엇이든 구할 수 있게 되었으나 아직 완성이 아니다. 이 땅도 이 몸도 완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이 땅에 임하지 않았고 나의 성화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흔히 이야기하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존재로 살아간다.


기독교의 마침은 십자가의 사건이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 수난은 부활로 바뀌고 승천으로 이어져, 재림으로 마무리된다. 승천 후 재림 사이의 시간이 현재이며, 이 기나긴 시간동안 예수는 자기 대신 성령 하나님을 보내셔서 자신의 일을 대신 하도록 하신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신다. 성령 하나님을 통해, 우리는 엄밀히 이미 하나님을 누리고 그분 안에서 살아갈 수 있으나 아직 우리가 온전히 성화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현재는 메시야 부활승천 이후의 기독교다. 마침이 아닌 진행형이다. 마침이라 부를 수 있는 날은 (적어도)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임하는 때다. 예수께서 재림주로 오시는 그날이 마침이라 부를 수 있다.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온전히 회복되는 아름다운 날이 그 날이다. 그날이 와야 '아직'이 끝난다. 그러니 아직은, 아직은 예수의 영으로 오신 성령 하나님께 기댄채 오늘을 분투하며 살 수 밖에 없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베풂과 용서」에서 '믿는 것과 감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것이라고 말한다. 전제로서 그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서 받아내는 흥정행위는 옳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니시며 우리의 손으로 그분께 무엇을 새로이 드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분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며 동시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또한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과 우리를 서로 독립된 존재로 여겨, 다소 동등한 관계에서 믿음을 선택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도 성립되지 못할 말이라 주장한다. 우리의 숨과 생명은 모두 그분에게서 나왔으니, 우리가 불가분 그분에게 종속되지 않기란(피조물의 신분을 벗어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나 타종교의 신도를 자처하기 전에는 더더욱.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매일 현재를 분투해야 하는 이 '이미와 아직 사이'의 현실 가운데서, 그분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지켜주심과 채우심을 바라며 사는 것이 합당하며 자연스럽고 적절하다. 사과 한알 고르지도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우리에게 주신 보편적 이성과 지능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나님의 능력에 기인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우리가 바르게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과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할 모든 지혜가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구하고 바라며,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이 응답되었을 때 '감사'하면 된다.


그런 면에서 감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고결한 행위일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마음을 담아 무엇을 해 드리고자 해도, 그것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보상이 될 수 없다. 주신 분께 향한 감사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어버이날 고사리손으로 접어 온 색종이 카네이션 따위가, 키워준 부모에 대한 보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을 만드느라 수고와 노력과 정성이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감사의 표현이지 양육받은 것에 대한 보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어버이 입장에서 그것을 기쁘게 받아 보상처럼 여길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받는 이가 선택할 문제지 이쪽에서 예단할 일은 아니니까. 다윗과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하나님 거하실 곳을 만들어 드리겠다 발심을 했을 때, 혹은 거하여 달라고 아뢰었을 때, 하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는지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쉽겠다.


나는 죄인이다. 그것을 깨닫게 되었기에 예수의 십자가 고난이 내게 유일한 소망이 되었었다. 나는 그날을 회심의 날이라 기록한다. 값없이 주어진 예수의 희생에 대하여, 내가 무엇을 드려서 얼마간이라도 값을 수 있단 말인가? 예수로 인해 의인이라 칭함받게 되었고 예수의 희생이 있기 전에는 흑암에 둘린 죄인의 처지였는데 내가 무엇을 가져다 드리면 그분에게 '드렸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이전에, 나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애초에 내가 죄인이든 의인이든지, 내게서 나온 것들로는 창조주인 그분께 제물로 드릴 것이 없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보다 더 좋은 것들을 이미 가지고 계시고, 만유의 모든 것이 없어도 이미 완전하시고 풍요하신 분이다. 만유는 그분이 만드신 바요, 그분은 만유를 창조하기 이전부터 온전한 삼위 하나님으로 존재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이 창조한 만유 가운데서 태어난 내가, 만유 안에서 한톨의 먼지같이 작고도 유한한 내가, 만유 안의 것을 무엇인가 박박 긁어다 그분께 드린다니, 더구나 그것이 그분에게 영광이 된다고 믿는다니!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믿음이리라.


그런 어리석은 믿음에서 헤어난지 얼마 되지 않는다. 이토록 명확한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이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그분만 주실 수 있는 것이 있다. 내게 주신 지혜와 재능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있고,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해 펼치시는 일들도 있다. 그분만 주실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제는 주실 수 있는 분이자 바르게 인도하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고 따라가는 삶이다. 개인적 체험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삶은 이미 시작된 듯 하다. 몽환적이지 않고 직관적이다. 황홀경 안에 있듯 핑크빛이진 않으나 쾌청히 먼 곳을 바라보듯 마음이 선명한 느낌이라는 의미다. 지금 이 삶. 믿음과 감사를 알아가고 바라보는 삶. 이 삶이 더 좋다. 지금이 참 좋다. 감사한 일이다. 감사나 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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