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2 : 28~34
골고다 수난이 다가오던 그 예루살렘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시험하려 하였다. 바리새파와 헤롯파가 함께 세금문제와 우상숭배 문제로 얽으려 했으나 황제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들고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로 응수하셨다. 사두개파는 '기업무를 자'(嫂婚法) 개념을 들고 왔다. 남편(남자)이 없으면 여자의 생존이 힘들었던 그 시대. 만일 한 여인의 남편이 죽어 그녀를 동생에게 맡기고, 그 동생도 죽어서 그 다음 동생에게 맡기고... 이 여인이 결국 7형제를 전부 남편삼아 살게 되었다면 부활의 그날에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한단 말이냐 물었다. 예수는 "부활할 때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니 그런 걱정은 할 일이 없다"고 하셨다. 사두개파의 질문 핵심은 부활신앙을 부정하는 데 있었던 터라 예수께선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말하자면, 성경에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했는가? 하나님은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라고도 말씀하셨다. 이에 대해 서형섭 목사(대표:창세기주해묵상,이레서원/etc.)는 이렇게 주해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족장들의 이름으로 자기를 계시하셨다. 이 구절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끌어낼 수는 없다. 다만 여호와께서 모세 앞에서 이미 죽은 족장들의 이름을 부를 때에 여호와는 족장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은 그들의 죽음에 의해서 해소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런 성서 이해에 따라서 족장들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 그들은 믿음으로 하늘 본향에 들어갔고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
“그들이 만일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더 좋은 곳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늘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두셨습니다”(히 11:16).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항상 살아계신다. 그는 죽은 자들의 이름을 자신에게 사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 이것이야말로 죽은 자들의 부활을 위한 증빙구이다. 족장들은 죽었으나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살아있으며 그들에게 부활이 예정되어 있다.
족장들에 대한 약속은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는 것에 근거한다(창 12:3). 이 약속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다(갈 3:8-9).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 3:15; 갈 3:26). 이 생명은 지상적 삶이나 죽음 이후의 삶이나 살아계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다(요 17:3; 빌 1:23).』
- 생명 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오해한다(막 12:13-27)서형섭
오늘 본문은 이에 이어지는 '서기관'의 질문이다. 서기관은 영어로 'teacher of the law'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러니 '율법학자'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서기관이란 말은 현대 정서에 좀 덜 부합하는듯하다. 아무튼, 바리새파, 사두개인, 서기관까지 당대의 종교지도층이 전부 대표성을 지닌 질문을 한 셈이다. 이 율법학자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율법학자답게, 율법의 최고봉 - 하나님이 원하시고 명하시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 이에 예수께서 이와 같이 답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29~31)
미로슬라브 볼프는 '베풂과 용서'에서 하나님은 끝없이 베푸시되 우리의 조건을 따지거나 요구를 걸고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지속적으로 베푸시는 분이라고 서술했다. 만일 우리에게 조건을 내 걸었거나 요구사항에 대한 보상으로 베푸신다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들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여기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끝없이 도전하고 나아가는 존재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번번히 실패하고 주저앉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랑을 해 본 적이 있기는 할까? 우리는 우리 자신마저도 때때로 방치하고 외면하는 존재들이다. 열렬하게 나를 사랑하고 가꾸고 유익하게 하기보다는 귀찮아하고 외면하고 포기하고 적당히 합리화한다.
무엇보다, 지속성에 있어서 우리는 영구적인 힘을 낼 도리가 없다. 강박에 의한 동기부여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힘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또한, 병적인 강박에 의한 사랑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런 존재인 나와 우리가, '내가 나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라'는 두번째 계명 역시 지켜낼 수 있을리 없다. 인간은 예수께서 정리한 이 두 계명을 지킬 수 없다. 지켜낼 힘과 능력이 없고 의지가 없다.
이 두 계명의 말씀을 먼저 지키신 분이 계시다.
하나님은 자기 마음과 생명과 뜻과 힘을 다해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자기 아들의 생명도 아끼지 않고 인간을 위해 보내어 주셨다. 그것은 또한 실로 인간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신 사랑이다. 아들의 생명과 맞바꾸어 우리의 생명을 건지셨으니 이보다 더 동등한 방법으로 우리를 대하실 수는 없으시다. 그 조건없는 사랑, 지속적인 사랑, 지금도 계속되는 사랑 때문에 오늘도 내가 살 수 있다.
또한 삼위의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시기를 이와 같이 하신다. 성부는 성자에게 자기 권세와 영광을 주었으되, 성자는 성부의 뜻만 따라서 이를 사용한다. 성령은 예수님 대신 다른 보혜사로 오셨으되 성부와 성자의 이름만 드러내며 조용히 섬기신다. 성부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성자를 이 땅에 보내어 죽음에 내어주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셨고, 성자는 자기 생명을 성부의 뜻에 따라 죽음에 넘기우기까지 순종하였으며, 성령은 성자의 도를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오늘도 함께 하셔서 우리를 영원히 포기않고 인도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이 난다. 나의 과거를 돌아보면 쌓다 만 모래성의 흔적들과 서둘러 덮어버린 냄새나는 허물들만 보인다. 지금까지의 나를 돌아보자면 나는 일어설 수도 없고 나아갈 수도 없는 존재다. 구제불능. 연약한 본성이 언제까지나 자리하고 있는 그런 존재다. 나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킬 가능성이 도저히 없다.
그런데도 오늘 이렇게 성경을 펴고 하나님을 묵상하고 나를 돌아본다. 성령의 가르침이 나를 하나님의 성품 안에서 안심시키고,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며 내게 힘을 주신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고 어떤 요건을 충족시켰기 때문도 아니다. 어제 선행을 했기 때문도 아니고 지난 달에 복음을 전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런 일은 없었다.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실과 열심과 사랑이, 언제나 내게 임하는 은혜의 유일한 이유이며 충족조건이라고 믿게 되는 오늘이다.
그분을 믿고, 나도 오늘 다시 새롭게 사랑하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