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46~52
예수께서 수난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여리고에서 맹인 바디매오가 예수를 만났다. 예수께서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크게 소리질러 예수를 불렀는데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며 나무랐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더 크게 소리질러 예수를 불렀고, 예수께서 이를 듣고 그를 데려오라 하셨다. 예수께서 그에게 소원을 물어보셨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대로, 그는 눈이 떠져 보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예수를 따랐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때론 매우 신나고 감격적인 사건이다. 회심이 일어난 순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존재처럼 다가온 기억, 그리고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따라 삶의 모습들을 조금씩 바꿔나가보는 걸음마 같은 순간들은 생각보다 달콤하고 행복한 경험들이다.
오늘 본문의 바디매오도 그렇지 않았을까? 평생을 눈먼 상태로 살다가 예수의 능력으로 보게 된 그는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믿음이 있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10:52a) 눈을 뜨게 된 바디매오는 자신을 구원해 준 장본인, 예수의 뒤를 따른다.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10:52b)
아마 그의 달콤한 신앙생활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을 것이다. 이어진 11장은 예루살렘 입성장면이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다. 마가복음 14장에는 이렇게 기록된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막14:50)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베드로 한 사람을 제외하면 그날 밤에 남아있는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바디매오도.
참 황망한 신앙생활이다. 구원의 감격과 은혜를 맛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나를 구원하고 치료하고 건져 주신 그분께서 죽임을 당하고 무덤에 들어간다. 따로 모일만한 무리도 장소도 남아있지 않고 이 신앙의 여정은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누가 알았을까. 예수께서 오신 것은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들어가시기 위함이며, 거기서 부활하여 하늘의 생명이 땅의 백성들에게 영원히 미치도록 하려는 것이었임을.
제자의 삶에 대해 마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전언은 매우 분명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본문에 따르면 제자의 길은 오중복음과 삼박자축복 같은 것이 쏟아지는 길이 아니고, 부모형제와도 어긋날 수 있는 길이며 박해가 따르는 길이다. 박해가 '있을 수도' 있는 길이 아니라 박해가 '겸하여' 주어지는 길. 다시말해 고통과 수난이 '내정된' 길이다. 그러나 그 길에는 영원한 생명도 함께 주어진다.
제자의 삶은 또한 섬기는 삶이기도 하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3~45) 예수께서 섬기러 오신 고로, 그의 제자된 이들 역시 지위와 내공이 깊어갈수록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로 가는 게 정상이다. 지위와 내공이 깊어갈수록 섬김을 받게 된다면 이는 예수의 예언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제자의 삶은 예수의 뒤를 따라 죽음을 받아들이는 삶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고통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도 많이 설교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당시 사람들에게 고통분담 따위가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길로써 다가왔을 것이다. 또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이 병행되었으니 자신의 뜻과 의지를 접고, 이른바 '아닥'하고 예수님의 뒤를 똑같이 따라오라는 의미다. 그게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는 삶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낯익은 희망의 메시지 따윈 없다. 우리가 일상에서 행복하길 원하시고, 복 주기를 바라시는, 안전하게 거하길 원하시는 그런 희망전도사 예수는 없다. 예수님의 약속은 그런 거친 길을 함께 가는 너희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며 늘 함께 할 것이고, 너희가 이러한 삶에 대해 변론할 일이 생긴다면 친히 해야할 말을 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복음서와 서신서에 등장한 예수님에게서, 잘되는 나와 긍정의 나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사도들과 제자들의 삶이 이를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번영신학은 예수가 모든 가난과 저주와 질병을 가져가셨으므로 우리는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누린다고 주장한다. 성서와 대조해 볼 때 기가막힌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이 땅에서 풍요를 누리는 사람도 있고 아닌 이도 있는 것이지, 예수믿는 이들에게 늘 풍요가 깃드는 것은 아니다. 풍요로운 이나 가난한 이나 생명의 복음이 동일하게 주어질 뿐이다.
다시 본문의 바디매오를 떠올려 본다. 그의 삶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알 길이 없다. 설화나 전승도 찾기 힘들다. 그런데 바디매오에게서 나를 본다. 예수를 처음 만나 감격하고 행복했던, 허니문의 기간이 나도 있었다. 성령의 세미한 음성에 귀기울이고 수시로 묻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예수의 뒤를 따르는 것이 나 역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인 것을 잘 몰랐다. 그 십자가는 나를 불편하고 괴롭게 만드는 이들에 대한 참음이나 인내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 부정을 수반할 뿐 아니라 자기의 주장과 뜻과 의지가 모두 죽는, 말 그대로 죽는 일이다. 매일 십자가를 진다는 것, 나는 매일 죽노라 말했던 바울사도의 편지도 같은 뜻이리라고 생각한다. 그럼으로 얻어지는 유익은 무엇일까? 매일 자기 부정과 자기 주장의지를 죽음에 넘기는 것을 선택하는 삶은 [선악과를 먹기 이전 상태로써 요구되었던 인간 모습]과 유사다. 내 뜻과 의지가 부인(deny)되고 죽었으니(died) 제자는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 내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의지에 기인하고 기대하여 살아가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이 경험을 하게 해 주겠다고 해 주지 않고, 이런 고백을 하는 자들 - 이렇게 살아가는 자들 - 이야말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되게 해주세요가 아닌, 이렇게 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여김받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책임을 하나님께 미루고, 후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 누가 자기 의지를 드려 하나님을 따르는 이인가는 명백하지 않을까. 물론, 사과 한개 사면서도 '이거 살까요 저거 살까요' 물어보는 신앙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지혜와 명철을 너무 도외시하는 처사같다. 나는 그런 신앙하고는 좀 맞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머리는 장식이란 말인가.
묵상의 시간, 제자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내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 중에서, 내가 선택해야 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의지와 뜻대로 되어지기를 구하기로 다시 마음 먹는다. '되게 해 주세요'는 너무 비겁하다. 안되더라도 '내가 하겠습니다'가 되어야 어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묵상도 선교도 신앙의 그 어떤 모습도, 삶의 그 어떤 결정들도 그러하다. 눈을 뜬 바디매오의 기적이 아니라, 바디매오의 일상의 신앙에 귀를 기울이며 나의 모습을 돌아본다. 그의 삶이 결국엔 하나님 안에서 잘 마무리되었기를 바라마지 않으며, 내 삶 역시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잘 마무리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려고 분투하는 삶 안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