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2~13
예수께선 자신의 사명과 운명에 대해 미리 알고 계셨다(막8:31). 그는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뒤 3일만에 살아나게 될 것이었다. 베드로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었던 사람이다(막8:29). 그러나 오신 그리스도가 해야 할 일이 위와 같은 것들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메시야께서 죽는 것은, 심지어 죽기 위해 이 땅에 왔다는 것은, 그것은 안될 일이라 생각한 듯 하다. 예수가 말한 그리스도의 운명이 베드로가 생각해 왔던 그것과는 너무 달랐다는 의미가 된다. 베드로는 그런 메시야 사역을 동의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강하게 꾸짖듯 만류했다(항변-막8:32).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베드로의 만류가 아랫사람으로서의 읍소가 아니라 노기를 띤 꾸짖듯한 형태의 것이라 해설하고 있다. 이에 예수께서도 그를 강하게 꾸짖고 제자들을 훈계하셨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막8:33~9:1)
이 사건 이후에 기록된 것이 오늘 본문인 변화산 사건이다. 앞선 훈계의 마지막 문장이 실제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공관복음서들은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갔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이들 앞에서 형상을 변모하셔서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고결한 본 모습을 드러내셨다.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변화되신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보게 된다(막9:2-4). 오래 전 사람인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본 것은 신기할 것이 없다. 예수께서 알리셨거나 본인들이 자신들을 간단히 알렸을 수도 있다. 그는 이 놀라운 상황에 정신이 없다.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예수와 엘리야와 모세를 모시고 자기들도 여기에 있으면서 모시게 해 달라고 한다(막9:5~6).
내가 주목한 것은 베드로가 이들의 '정체' 특히 자기 스승인 그리스도 예수의 정체를 비로소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적 존재로의 변모를 본 이후에도 베드로는 자기 이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까지 그는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은 했으나 그의 섭리와 계획을 끝내 이해할 수 없었던' 애처로운 제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예수께서 제사장 무리들에게 붙잡히시지 않도록 목숨을 걸고 저항하려 했다. 예수께서 예견한 자기의 길이 그것이었음에도, 이미 오늘 본문에서 밝혀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사탄 소리까지 들어가며 훈계를 당했으니 베드로가 이를 기억에서 잊었으리라곤 생각이 안된다.
그러나 예수가 변화산에서 신적인 존재로 변모된 모습까지 보였음에도 베드로의 인식은 여전히 땅 위의 것, 그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인지부조화라는 말이 떠오른다. 메시야는 자기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실패하고 비난받고 마침내 죽어야만 했는데, 이 제자는 그것을 직접 귀로 들었을 뿐 아니라, 그 고난 이후에 오는 소망에 찬 미래의 계시를 직접 눈으로 보고도, 자기 인식과 일치시키지 못했던 것 같다. 메시야는 영원한 통치자이고, 메시야가 할 일은 의당 이런 것 저런 것들이고, 거기에 이런 저런 것들도 해 주셨으면 좋겠고... 명백한 인지부조화라는 생각이 든다.
내 신앙 여정의 인지부조화.
오늘 보니 나도 베드로 이상의 혼란을 겪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예수 믿으면 잘 될 줄 알았다. 육신적으로 잘 먹고 잘 입을 줄 알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땅에 이상적인 작은 공동체라도 하나 세울 수 있을 줄 알았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모습을 닮은 어떤 모임이 세워질 줄 알았다. 아니, 세우고 싶었고 간절히 갈망했다. 나의 20대 후반부터 30대 후반까지는 오롯이 거기에 드려진 삶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했던 교회공동체는 장소문제와 재정난, 끊임없는 사람들간의 갈등으로 뒤섞인 채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초라하게 문을 닫았고 나는 몇 달을 시체처럼 누워서 눈물만 흘렸다. 다시 일어설 희망을 갖고 비행청소년 감호시설에 들어갔으나 원장 목사 부부의 비리와, 그 작은 공간 안에서도 알력 다툼을 하는 다른 선생들의 까닭없는 모함 속에 결국 제일 먼저 쫓겨나게 되었다. 이후에 있었던 선교회, 기독교 대안학교, 직접 세운 교회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쉼없이 치열한 시도를 하며 초막 셋을 짓기 위한 몸부림을 쳤던 것 같다. 그 놈의 초막. 어찌나 치고 싶었던지. 눈 앞에서 예수의 신적 현현을 본 베드로처럼, 회심의 순간 알게 된 그리스도 예수의 빛을 느끼고 나 역시 베드로처럼 우왕좌왕하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죽으러 오신 예수를 알지 못했다. 실패하러 오신 예수를 알지 못했다. 초라하게 죽으러 오신, 배신 당하러 오신 그 예수를 알지 못했다. 아니, 수없이 듣고 배우고 아멘했으나 인지부조화였다.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사건이었고 그 둘을 연결시키지도 못했다. 그러니 정말 인지부조화 아닌가.
베드로와 나의 더 큰 문제는 신적인 모습을 보이신 예수를 목격하고도 부활의 가르침을 실제적으로 연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분명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도 가르쳤다(막8:31). 그리고 자신이 '성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과 함께 올 때'가 있다고도 가르쳤다(막8:38). 그러면 예수의 죽음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부활의 그날에 촛점을 맞추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골고다의 그날까지 베드로의 행보는 그런 유추를 할 수 없게 만든다. 나 역시 회심의 그날 예수님의 구주되심과 빛 되심을 느끼고 영혼이 살아났음에도, 초막 셋을 지어 예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리라는 충심만 가득했지 정작 예수의 영이 이끄시는 여정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아닌가 싶다. 그러니 그렇게 헤맸겠지.
헤매고 헤매다, 하다하다 악에 받쳐 폭발한 그 날. 나는 하나님께 드디어 성질을 내고 항변하고 노골적으로 적대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 상처를 줄만한 행동이라면 서슴치 않았다. 나의 30대 후반 3년여는 그런 시절이었다. 그러면서 내 안의 어두운 끝을 본 것 같다. 다행히도 그런 시절까지 지나고 나자, 베드로를 향해 내 양을 먹이라는 예수의 음성이 내게도 진정한 복음으로 다가왔다. 네가 나를 (여전히) 사랑하느냐는 예수의 물음에서 한없는 죄책과 미안함과 회개와 사랑이 느껴졌다. 역설적이게도, 그분이 인류의 죄를 지고 죽지 않으셨더라면 베드로에게 두번째 기회는 없었지 않을까. 살아도 산 게 아니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렇다. 눈이 뒤집혀 카인의 돌을 들고 막무가내로 휘둘러대다 기운이 진해 바닥에 누웠을 때, 믿음으로 살아갈 희망없이 숨만 쉬고 물고기만 잡고 있었던 그 때. 예수께서 다시 말씀으로 찾아오셨다. 그게 작년에 있었던 100일 결사, 200일 결사의 묵상 때 일이다. 참으로 다행이다. 예수께서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신 것이 내게도 소망이 되었다. 예수께서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오실 것도 내게 소망이 되리라. 예수를 세번 부인하고 낙담했던 베드로를 찾아오셨다면 나에게도 소망이 있지 않을까. 베드로의 방황조차도 내게는 복음이 된다.
내 삶 역시 누군가에게 소망이 되는 삶이길 희망해 본다. 베드로의 이야기가 내 삶의 작은 희망이 되었듯이, 나의 우왕좌왕하던, 때론 어둠에 심히 빠졌던 나의 삶도 누군가에겐 희망의 이야기가 되도록 내 남은 삶이 그분의 뜻대로 드려지기를 소망해 본다. 내 힘으로 짓고 싶었던 초막은 판판히 무너졌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림은 아니었나보다. 새로운 초막을 지으려는 마음은 어리석다. 내가 해야할 것은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천국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변화산의 예수를 보고 베드로가 했어야 하는 것은 그 산에 초막을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을 통해 부활의 소망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라보고 따르는 것이어야 했듯이.
하나님의 열심이 끝까지 나를 이끄시길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