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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모츄 Jan 16. 2024

목자없는 양에게 필요한 양식은

마가복음 6:30~44

열두 제자들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막6:7). 30절에 '사도'라고 되어 있는 것은 이들의 직함이 아니라 '파송된 자'라는 뜻으로서 사용된 것이다. 이들은 곳곳을 방문하며 예수의 권능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회개를 촉구하였다(막6:7-13). 그들이 예수께 다시 돌아와 사역을 보고하였을 때, 그들은 몹시 지쳐있었고 주변도 매우 번잡했기 때문에 예수께선 그들에게 한적한 데로 가서 잠시 쉬라고 한다. 이들은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이동하려 했는데, 많은 무리가 눈치를 채고 먼저 그곳으로 가서 대기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목자없는 양처럼 여기시고 여러가지로 가르치셨다. 어느 신학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그 '가르치심'의 종속된 연장선에서 보아야 한다고도 해석한다. 


'목자없는 양'이란 표현은 사명을 잃은 주의 종들 아래 있는 백성들을 지칭하는 말로 구약에서 사용되었다. 에스겔 34장 초반에 잘 나와있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겔34:2-5)


누가복음서는 예수께서 그런 이들을 '영접하여' 가르치셨다고 기록한다. 예수께선 제자들이 일으킨 기적의 소문을 듣고 모여든 이 사람들을 귀찮아 하지 않으시고 환대하셨다. 신실한 목자가 부재한 시대를 살고 있는, 그래서 눈에 보이는 표적 하나에 구름처럼 몰려드는, 집 없는 양떼같은 이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그가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다(눅9:11). 같은 구절에는 병자도 고쳐주셨다고 병행하여 기록되어 있다. 병자를 고치신 것도 실은 하나님 나라의 일의 연장이자 증명이다. 일찌기 세례요한이 옥중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가 정말 메시야가 맞는지 물어보라고 시켰을 때, 예수께서는 예언의 말씀을 인용해 이렇게 말씀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7:22)


주석은 이 말씀이 이사야서 26장에서 61장 사이에 발견되는 이사야 선지자의 대언들과 일치시키고 있다. 즉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과 이런 일들을 일으킨 이의 등장은 '구원의 약속의 성취'라는 측면을 설명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으며, 하나님 나라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병자고침과 말씀을 가르치침 같은 행위들은 '목자없이 방랑하는 자기 양떼를 손수 먹이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여기에 예수는 한가지 기적을 더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듣고 경험하느라 날이 저물도록 배를 곯은 이들에게 실제로 밥도 먹이기로 하셨다. 누가 이 양식의 기초를 쌓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성경은 제자 중 하나가 물색하여 어느 청년의 도시락을 가져왔음을 이야기할 뿐이다. 사탄은 예수가 돌덩이로도 빵을 만드실 수 있는 분임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돌덩이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어느 한 사람의 작은 헌신을 너무 강조해 설파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얼른 그런 인간이 되라고, 어서 그걸 내밀라고 등 떠미는 것 같아서다. 내가 아는 한,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은 그렇게 하신 적이 없다. 


(또한 자기 도시락을 기꺼이 헌납한 이를 부속품 취급함도 온당치는 않아 보인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수한 개미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대기업 시스템이 아니다. 슬프게도 현재의 교회는 그런 조직체의 모습을 띠고, 한동안 개도국의 기업들처럼 아주 잘 나가다가 이제는 선진국이 이미 경험했듯이 종교적 조직적 측면에서 쇠락의 길을 겪고 있다. 나는 오병이어를 싸 온 청년도 배불리 먹었다고 단정한다. 다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는데 그 사람만 배를 굶었을리가 없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이처럼 공평하고 온당하다. 누군가를 쥐어짜서 어떤 일을 이루어내는 집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와 능력이 흘러가는 것을 체험하는 이들의 회합이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공동체란 물론 모두가 고통과 기쁨을 분담하지만, 책임을 진다면 더 큰 책임은 리더가 진다. 예수께서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시고, 하나님은 그 독생자를 보내신 바, 이 원칙대로 살고 계심을 증거하고 계신다. 하물며 제자되겠다는 교회 안에서야!)


내가 생각할 때 오병이어 사건의 핵심은 오실 그이, 메시야 되신 '예수님 그 분으로 인해 모든 이들이 양식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이날 기적의 음식을 얻어먹고 이들은 불쌍한 양떼에서 어리석은 양떼의 본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예수를 왕 삼으려고 추적해 따라왔던 이들에게 예수는 매정한 말씀을 하신다.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13,14,26,27)


여기 예수께서 주고자 하신 것은 하늘의 양식, 영생을 위한 양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부께서 보내신 인자, 즉 예수 자신이 주실 수 있다. 예수님은 그래서 아래와 같이 말씀을 이어가셨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6:28-29)

그런 거 말고, 어제처럼 실제적인 떡을 갖고 싶었던 이 "목자없는 양 떼같은 무리"들의 질문은 집요하게 어리석다(요6:28~34). 이에 대한 예수의 결론적인 대답은 "내가 바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니 나에게 오는 이는 결코 목마르지도 굶주리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요6:35~48). 


영원한 생명은 무엇인가?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2) 정확치는 않지만 어느 신학자가 영원과 영생을 구분하여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영원이란 무한한 시간을 보내는 것에 불과하지만, 영생은 그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그분과 함께 교제하는 것이라고(아마 바르트였던 것 같은데 문장이 명확치 않다. 대강 이런 뜻이였겠거니 할 뿐이다).


즉, 예수께서 주시고자 하신 참된 음식은 우리 영혼을 살리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이는 예수의 구속의 공로를 믿고 거듭난 이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수 있는 현재를 누릴 때 비로소 '먹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간이 바로 그런 시간이 하나가 되기를 바래본다.


작년, 신앙에 오랜 침체기를 벗어나고자 200일간 쉼없이 묵상하다가 300일차에 들어서며 매너리즘에 빠진 나를 보았다. 성령의 감동은 커녕 성경본문이 없어도 꽤 그럴싸한 묵상이 만들어질 것만 같은 오래된 능숙함이 고개를 쳐든 것을 보았다. 그런 것에 생명이 있을리가 없다. 선데이 크리스찬의 맥없이 공허한 예배처럼 또하나의 요식행위가 될 뿐이었기에 묵상을 그만두고 책 읽기에 집중했다. 그러다가 '기억의 종말'이라는 미로슬라브 볼프의 책 한권에 가로막혀 오랜 시간 그 책을 등산하듯 기어올랐다. 이제야 거진 다 읽었다. 내 안의 오래된 문제들을 되짚으며 읽느라고 반년이 넘게 걸렸다. 다 읽어가는 찰나에 묵상모임이 생겼다. 일주일에 한번만 공유해도 된다는 매우 느슨하고 마음에 드는 모임이다. 때마침 개인적으로는 느슨하게 일이 굴러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기적이다. 그분이 일으키신, 그분에 의한, 그분의 의지와 은혜에 의한 기적이며 또한 선물이다. 사실, 그분이 하신 모든 선한 것들이 그러한 속성을 지닌다 볼 수 있다. 내가 말씀을 볼 수 있는 것도 그렇고, 묵상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하다. 서로의 묵상의 글들이 서로에게 구운 물고기가 되고 얇은 떡 한조각이 되고, 주 예수의 축사를 통해 성령께서 각자에게 주시고자 하는 음식으로 바뀌어, 서로 먹고 먹이는 은혜의 양식이 되기를 바래본다. 그러고보니, 오늘 묵상은 새롭게 시작한 모임을 위한 묵상이었던 것 같다. 


묵상 초반에 보게 된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다고 하는 에스겔서의 말씀을 읽으며 마음이 아팠다. 그 비참한 모습이 나의 모습이기도 하고 많은 가나안 신자들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동일한 빚을 진 자들이다. 우리는 각자, 만인이 왕된 제사장이자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특별한 보물들(쎄골라)이므로 서로가 형제 자매가 되고, 서로가 목자가 되어 인애롭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되, 네 몸과 동일하게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부합하는 해석이리라 생각한다. 아주 가끔씩 물질은 조금 나누었지만 정서적, 영적으로는 과연 무엇을 누구와 나누어본지가 언제인지... 지나간 옛 아픈 기억은 망각과 포월의 호수 아래 녹이고 좀 더 힘내어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은혜가 내 삶에 깃드시기를 소원하는, 조용한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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