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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모츄 Mar 08. 2024

두 장짜리 라면서요!

착취와 헌신을 구분 못하던 그 시절

경제적으로 한참 어려웠던, 회심 초기였습니다. 어느 신대원에 다니던 멀쑥한 교회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 형, 부탁이 있는데요. 광고 전단 디자인좀 해 주시면 안되요?

- 크기가 어떻게 되는데?

- 크기는 잘 모르구요. 두 장짜리 광고래요.

- 어디다 쓸 건데?

- 저희 학교가 매년 뮤지컬을 하거든요? 거기 브로슈어에 들어갈 광고라는 것 같아요.

- 그래? 알았어.

- 저희 교수님 잠깐 바꿔드릴께요. 

그리고 그 동생은 무슨 높은 교수님이라며 나이가 꽤 많이 드신 듯한 목소리의 어떤 여자분을 바꿔주었고, 수고하십니다 할렐루야로 시작하신 걸걸한 목소리의 그 분은 '돈은 못 드리지만 잘 좀 부탁드려요'를 골자로 하는 통화를 필요이상으로 길게 하고 끊었습니다.


광고 전단 양면정도야 금방 끝나지 뭐. 한번 보여주고, 컨펌한다고 왔다갔다 해도 3일이면 끝나겠지. 그 동안 다른 일 하는데도 무리없을 테고. 라고 생각했지요.


며칠 후 가정주부이신 신학생 두 분이 원고를 전달하시겠다며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분들은 두 장짜리가 아니라 30p가 넘는 브로슈어 원고를 들고 계셨습니다. 어이가 좀 많이 없었지만, 어이가 없기는 그 쪽도 마찬가지였던가 봅니다. 가서 저한테 원고 주면서 인사만 잘 하면 된다고 단도리를 받고 온 모양인데, 일해주기로 한 사람이 오만상을 쓰고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그 쪽도 당황할 수 밖에요. 정말 열이 받아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그분들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정말 돈이 없어 보였어요. 차림새도 그렇고 눈빛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돈 없는 척 하는 사람과 정말 가난한 사람은 많이 다릅니다. 그들도 진짜 나처럼 가난한 아줌마 신학생들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원고뭉치를 들고 나를 찾아온, 하나님 밖에 모르는 만학의 신학도들. 그분들이 사온 붕어빵과 캔커피가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게다가 이 뮤지컬을 통해 얻는 수익금은 이 가난한 신학생들 자신에게 장학금의 형식으로 조금 돌아가는 모양이었어요. 애초에 취지가 그렇답니다. 그런 구조다 보니 자금지원도 거의 없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아, 미치겠네. 어쩐지 말에 기름칠을 과하게 한다 싶더니... 그 교수가 괘씸했지만, 그리고 그가 신학대학원 교수라는 게 더 괘씸했지만, 내 눈 앞에 섰는 두 아주머니들의 눈빛 때문에 속는 셈치고 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두 페이지짜리 일이 30페이지로 부흥이 되었던 겁니다. 사흘은 커녕 당시 제 깜냥으로는 꼬박 일주일짜리 일이었어요. 인디자인은 커녕 포토샵 밖에 쓸 줄 몰랐던 완전 초짜 신출내기였으니 일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대부분의 시간들을 그 브로슈어 만드는 일에 매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잠도 못자고, 오히려 이들의 수정요청에 전전긍긍하며 매일밤 작업을 해야만 했습니다. 주객전도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누가 만들어 두었나 봅니다. 어찌나 깨알같은 수정사항이 매일매일 많던지...


정말 최종의 최종의 마지막 수정을 하면서, 그때 찾아왔던 아주머니 신학생 중 한분과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내내 일을 진행하면서 계속 피드백을 주고 받았던 터였습니다). 저도 한마디 해야지 도저히 안되겠더라구요. 내용은 대략 이랬습니다. 


- 00님, 벌써 수정을 몇 번째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자꾸 말이 틀려지시니 곤란합니다.

- 네 죄송합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에요. 내일이면 인쇄소에 넘겨야 하거든요.

- 그런데 그걸 오늘 밤에 말씀하시면 어떻합니까. ㅠㅠ

- 정말 죄송합니다...

- ......

- .........

- 처음에 교수님이 거짓말 하신 거 아시지요?

- 네 알고 있습니다...

- 제가 이 일을 계속 하는 것은, 그리고 마지막까지 하고 있는 것은,  제가 이 일을 하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제 입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을 지키려고 일을 끝까지 하고 있는 겁니다. 결코 00님이 계신 신대원이나 신대원의 뮤지컬을 위해서가 아님을 알아주세요.

- 네 알겠습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그랬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 일을 어찌됐든 '맡았'습니다. 그렇게 내뱉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일을 완수했습니다. 결코 그 일 자체를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의 양심을 위해서 일을 한 거였습니다. 그렇게 새벽늦게까지 일을 마치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나절에 전화가 또 왔습니다. 


- 집사님 안녕하세요. 주무시는데 죄송해요.

- 네.. 또 무슨 일 있으신가요?

- 사실은 변동사항이 있어서 수정을 또 할 게 생겨서요..

- 오늘이 마지노선이라 인쇄소에 넘기는 날 아니었나요?(난 그렇게 들어서 밤도 샜는데)

- 네, 그런데 인쇄소에 연락해서 인쇄소 장로님이(인쇄도 공짜로 찍는 거!) 하루 정도는 기다려 주실 수 있대요.

- ........ 


.

.

.


그 일이 끝나고 이 분들, 저한테 너무 미안해 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고마워 했지요. 물론 그 교수란 양반은 전화 한번 없었습니다. 뭐 안 하길 다행이지요, 제게 욕만 대박 얻어먹을 판이었으니까요.


재밌는 부분이 있어요. 마감 당일에 일자를 미뤄가면서까지 수정했어야 하는 중요한 부분은 본문부분이 아니라 '후원광고'부분이었어요. 금전적 후원을 약속한 곳들에게 금액별로 광고지면 자리를 잡아주어야 하는데 그게 편집기간 내내 "진행중"이었거든요. 어디 교회가 얼마를 후원하기로 약속을 하면 거기를 사이즈에 맞게 그때 그때 넣어줘야 했습니다. 나중에는 그 교회들에 제가 직접 일일이 전화를 걸어 내용과 파일과 사진을 받아야 했고, 몇 군데는 컨펌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본문 내용 수정은 서너번 정도에 끝났고, 나머지 밤샘은 다 이 광고들 수집하고 편집하느라 보낸 시간이었던 겁니다.


일이 진행되는 내내 연락이 없던 동생녀석, 행사가 끝나고 얼마 후 전화가 한 통 왔습니다. 덕분에 잘 마무리 되어서 감사하다고, 모두들 나를 보고 싶어한다고(?) 합니다.

그래, 어디로 가면 되냐, 밥은 사주냐니까 이 녀석 하는 말이 내일 저녁 몇 시까지 **로 오랍니다. 응? 패밀리 레스토랑 **? 1인당 기본으로 2만원 넘어가는 거기 말이냐? 그렇답니다. 열이 확 올랐습니다. 아니, 그 많은 인원들이 회식할 돈은 있는거야? 그간 참았던 화 같은 게 올라와, 안 좋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았습니다. 형이 그 날 시간이 없다, 됐다, 좋은 시간 보내라, 좋은 말로 고사하고 끊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이 녀석이 우리 집에 덜렁덜렁 찾아왔습니다. 벙실벙실 웃으며 이 녀석이 꺼내 든 것은 3만원짜리 감사패였습니다. 밥도 안 먹겠다니 내가 무슨 이름도 빛도 없이 헌신하는 성인으로 보였는지? 원형의 저가 유리에 레이저로 쏴서 투명하게 글자 새기는 그런 거 있잖아요. 거기에 "공로를 치하"한다며 제 이름 석자를 떡 박아서 가져왔더군요. 씁쓸한 감정이 밀려왔어요. 고맙다고 말하고 저녁을 함께 먹고 보내긴 했지만 서글프기도 하고 개탄스럽기도 하고, 여러가지 것들이 밀려왔던 것 같아요. 아마도 디자이너에 대한 교회의 인식이랄까, 실은 교회에서 하는 활동이라면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 너무 당당하고 그래서 뻔뻔하고 질리기까지 하던 당시의 그 행태... 그런 것들에 슬펐던 것 같아요. 제가 사랑하는 교회, 나도 속해 있는 교회, 그 교회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까닭에요.


그 감사패는 그날 저녁, 씁쓸한 미소와 함께 쓰레기통에 버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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