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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모츄 Mar 22. 2024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전문인 선교사 양성 대학원에 갔던 이야기

누구나 신앙을 하다보면 이 길이 맞나 생각해 보게 될 겁니다. 한편, 이 길이 진짜다!라며 올인하기도 하겠지요. 같은 길을 걸어가도 생각이 수시로 변하니, 나중엔 내가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길이 나를 밟고 지나는 중인지 알 수가 없게 될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명지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 지금은 폐과가 된 '문화교류선교학과'에 입학하여 생활했었습니다. 저는 들어갈 때만 해도 명확한 확신과 당찬 포부가 있었습니다. 당시 총장이던 정근모 박사께서 취임 후 직접 만든 학과인데, 이 분이 우리 1학년 때 대선에 출마하시면서 총장을 사임해, 학과가 아주 곤란하게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 외부적 상황들과는 별개로, 저는 여러가지 학과의 정체성과 문제점들 때문에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2년이 흘러갔고 두번의 회지 편집디자인을 맡았었습니다. 사실, 이제 와 보면 디자인이라 부를 만한 뭔가는 없어요. 파워포인트로도 만들 수 있는 조잡한 수준이었는데, 그나마 2회차 때가 더 나았다는 게 위로가 되긴 합니다. 면구하지만 추억도 회상할 겸 몇 장 보여드리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게 1회차

이게 2회차


학과의 개설목적은 전문인 선교사 양성이었습니다. 이름부터가 Intercultural Study였으니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저 자신은 만화를 전공한 '전문인'이었고, 고로 선교사훈련을 받으면 되는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학과의 타이틀과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할렐루야를 외치며 가난한 신혼살림에 학자금 대출까지 받아 본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학과에 들어와 보니, 저 같은 일반적 직업이나 스킬을 가진 사람은 서너명도 안 되었습니다. 학과 설립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준 분들이거나, 협력하던 목사님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던 분들이 학생으로 등록한 경우였습니다. 은행가 출신이 두어분 계셨고...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그 외엔 40대 안팎의 목사님이 대부분이고, 30대가 갓 되었거나 아직 20대 후반인 청년 전도사님이 세 분 정도? 심지어 50대의 은퇴선교사님도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 생각에는, 전문인을 선교사로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들에게 직업기술을 가르쳐야 할 판이었습니다. 물론 마중물 주는 마음으로, 씨앗 심는 마음으로 모인 분들일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에 비해, 전문인 혹은 기술이 있는 엔지니어 평신도들을 위한 이들이 위주가 되는 학과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목회과정을 마친 이들을 위한 직업교육 과정 같은 것은 전혀 없었고, 모든 수업은 신학교 커리와 비슷한 과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처음으로 불만이었던 것은, 전문인 선교사 과정이니까 당연히 주류가 전문인들이어야 할텐데 목회자 특별 장학금은 있어도 전문인 장학금(?)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난히도 돈이 없어 힘들었던 당시의 저로서는 아주 간절한 부분이기도 했지요. 제가 이런 제기를 하니까 학과 교수님이 제안하신 것이 "어디든 좋으니 사역자의 타이틀을 붙여서 담임목회자의 확인서를 가져오면, 목회자에 준하는 인정을 하도록 행정상 손을 써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아내와 함께 고민했습니다. 사실 고민했다기보다 같이 화를 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말인즉슨 사역도 안하는데 사역자라고 가짜로 서류를 꾸미라는 것 아니냐. 그것도 무슨 사역자니 뭐니 이런 직함을 만들어서. 이게 뭐야 옌장. 도저히 그렇게는 못하겠더라고요. 물론 당시 교회공동체에서 하던 일이 적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렇게까지(직함을 만들어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예수쟁이 주제에 대놓고 거짓말 하는 게 너무 싫었거든요.


그래서 결국 이렇다할 혜택을 받아보지는 못했습니다. 공부라도 잘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학과의 설립취지부터가 의심스러운 마당에 동기부여가 안되고, 모든 수업이 영어로 진행되는 점도 크게 한 몫을 했어요. 매우 힘겹게 학점을 유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나름 수업은 참여했지만 장학금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이러저러한 고민 끝에 결국 졸업학기를 한 학기 남기고 과감히 자퇴를 선언했습니다. 학자금 대출만 남았지요. 사실, 저의 자퇴는 "당신들은 틀렸다"라는 외침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 같아요. 한 학기만 더 다녔으면 아무튼 석사학위라도 하나 받았을텐데 말입니다(석사 학위는 훗날 전혀 다른 학과로, 숭실대에서 취득했습니다). 이 학과는 제가 자퇴한지 2년만인가... 간신히 두세번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영영 사라진 것으로 압니다.


그래도 거기서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웨슬리안이신 故조종남 박사님의 조직신학 강의(크리스챤 독트린이란 과목명이었습니다만 배운 내용은 조직신학) 덕분에, 웨슬리의 기독자 완전과 알마니안이 왜 다른지 나름대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맑고 또렷한 음색으로 강의해 주시던 故전재옥 교수님(이슬람연구소 소장) 덕에 폭력적인 선교방법과 맹목적인 동화가 둘 다 얼마나 끔찍한가도 훗날 생각할 수 있게 되었구요. 단기든 뭐든 무조건 선교는 나가야 한다는 어느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그 주장이 왜 글러먹었는지 결론 내릴 수 있었고, 더 나아가 단기선교의 참여숫자를 교회실적으로 치부하는 못된 행태에 대해서도 아주 제대로 따박따박 논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빚이 된 대출금 때문에 잠시 혹했던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채무를 감당해 주십니다~!"라는 설교에 훅 빠져보기도 하고, 거기서 헤어나오면서 번영신학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고찰하게 되는 계기도 시작되었었습니다.


그 학과는 낯선 시도로 인해 발생한 미숙한 오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 오류를 통해서 오류를 보는 눈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오류를 싫어하게 되었고, 진리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무엇일까 더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배운 많은 것들을 재해석하고, 또는 흡수하여 오늘의 내가 되는데 일정 부분을 구성하고 있기도 합니다. 정말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 같습니다. 어디가서 무엇을 하며, 그것을 왜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여도, 설령 알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적이 있었더라도, 시간이 지나보면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저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고 싶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생, 제가 생각하는 해답, 제가 결론내리려 하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언제가 어느 학교에서 문화교류선교학과가 다시 생긴다면, 그리고 이번에도 많은 목회자들이 그 학과에 온다면, 교수로서 직업으로서의 만화가 무엇인지 보여 주고 싶네요. 그러나 역시, 전문인 선교는 전문인을 선교인력으로 키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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