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8:22~30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솔로몬왕이 화려하게 성전을 다 짓고 봉헌식을 거행하는 장면이다. 본래 성전 건축은 선왕 다윗의 소망이었다고 기록되었다(역대상22장). 다윗왕의 말을 빌자면 일의 정황은 아래와 같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 집을 지으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많은 피를 흘렸고 많은 싸움을 치렀다. 내 이름을 위해 집을 지을 사람은 네가 아니다. 네가 내 앞에서 이 땅에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보아라. 네게 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 그는 평안의 사람이 될 것이다. 내가 그에게 사방에 있는 그 모든 적들에게서 평안을 안겨 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솔로몬이니 내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이스라엘에 평화와 안정을 줄 것이다. 그가 바로 내 이름을 위해 집을 지을 사람이다.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스라엘을 다스릴 그의 왕좌를 영원히 세워 줄 것이다.’(대상22:7~9/우리말)
다윗의 말을 요약하자면, 자기가 성전을 짓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자원도 많이 모아놨으나, 하나님이 말씀하길 너는 피를 많이 흘린 자이기 때문에(부정한 자로 여기는 듯한 뉘앙스다) 깨끗하고 순결한 자로서 즉 후대왕으로 하여금 성전을 짓게 하겠다는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무엘 하편의 기록을 보면 그와 같지만은 않다. 하나님은 성전 건축이 소원인 다윗에게 "내가 언제 이스라엘 백성 누구에게든 '왜 내게 백향목 집을 지어주지 않느냐고 말한 적이 있더냐?" 되묻는다. 자기가 구원하고 자기가 일으킨 민족이며, 자신이 지키고 아껴갈 나의 백성들이라고 하신다. 그 백성의 무리에 왕인 너도 있고 그 아들이 후대왕도 있다고 하신다. 그들이 잘못을 저지른다해도 멸망시키지 않고 가르치고 혼을 내고 고쳐쓰며 자기 백성을 보존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삼하7장).
그날 밤 여호와께서 나단에게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여라. ‘나 여호와가 말한다. 네가 나를 위해 내가 있을 집을 지어 주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그날부터 오늘까지 나는 집에 있은 적이 없고 장막이나 회막을 거처 삼아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내가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옮겨가는 곳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 누구에게든 왜 내게 백향목 집을 지어 주지 않느냐고 말한 적이 있느냐?’
그러니 내 종 다윗에게 말하여라.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삼았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했고 네 앞에서 네 모든 원수들을 끊어 내었다. 그러니 이제 내가 이 땅의 위대한 사람들의 이름처럼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겠다. 그리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한 곳을 정해 그들이 뿌리박을 터전을 주고 그들이 다시는 옮겨 다니지 않도록 할 것이다.
또한 전처럼 악한 사람들이 그들을 더 이상 해치지 못하게 하며 내가 사사들을 세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했던 때와는 같지 않게 할 것이다. 내가 또 너를 네 모든 원수들로부터 구해 내어 평안하게 할 것이다. 나 여호와가 직접 너를 위해 왕조를 세울 것을 선포한다. 네 날들이 끝나고 네가 네 조상들과 함께 잠들 때 내가 네 몸에서 나올 네 자손을 일으켜 네 뒤를 잇게 하고 내가 그의 나라를 든든히 세울 것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집을 세울 것이고 나는 그 나라의 보좌를 영원히 세워 줄 것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될 것이다. 그가 잘못을 저지르면 사람이라는 막대기와 인생이라는 채찍으로 그를 징계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사랑은 결코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네 앞에서 없앤 사울에게서 내 사랑을 거둔 것처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계속될 것이며 네 보좌가 영원히 서 있을 것이다.’” 나단은 이 모든 계시의 말씀을 다윗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
(삼하7:4~17/우리말)
나단 선지자의 대언 속에 다윗이 피를 흘려서 뭐 이런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 이런 말씀을 하셨다해도 다윗 본인만 사무치게 들렸지(자기가 성전건축을 못하게 된 이유니까) 다른 이들에겐(특히 기록자들에겐)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성전 건축과 관련해 다른 대목인 열왕기상 9장도 훑어보았다. 여기는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짓고 난 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건축을 마치고 또 그가 바라던 모든 일을 이루고 난 뒤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셨던 것처럼 솔로몬에게 두 번째 나타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고 간구한 것을 내가 들었다. 네가 지은 이 성전을 내가 거룩히 구별해 내 이름을 영원히 거기에 두겠다. 내 눈과 마음이 항상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이제 너는 네 아버지 다윗이 한 것처럼 내 앞에서 충성스런 마음으로 정직하게 살며 내가 명령한 모든 것을 실천하고 내 규례와 법도를 잘 지켜라. 그러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을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않으리라’고 약속한 대로 내가 네 이스라엘 왕위를 영원히 세울 것이다.
그러나 너나 네 아들들이 만약 나를 따르지 않고 등을 돌려 내가 네 앞에 둔 내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않고 다른 신들에게 가서 섬기고 숭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에게 준 그 땅에서 그들을 끊어내고 내 이름을 위해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을 네 눈앞에서 던져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비록 이 성전이 지금 이토록 으리으리하더라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여호와께서 이 땅과 이 성전에 왜 이런 일을 하셨을까?’ 하고 비웃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들이 자기 조상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그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숭배하고 섬겼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신 것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왕상9:1~9/우리말)
아무리 좋은 일을 선한 의도와 동기에서 한다해도, 실행하는 방법 역시 지혜롭거나 선했다 해도, 그 일이 영속하리라는 법은 없다. 하나님을 위해서 지은 정성스럽고 웅장한 건물 조차도, 하나님은 받아주시기는 하나 그리 기뻐하시는 것 같지 않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너는 네 아버지 다윗이 한 것처럼 내 앞에서 충성스런 마음으로 정직하게 살며 내가 명령한 모든 것을 실천하고 내 규례와 법도를 잘 지켜라!"
좋은 일을 많이 하고, 훌륭한 업적이라고 평가되는 일들을 많이 이룬 목회자나 선교사 그룹이 인생의 내적인 문제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참 많이 보게된다. 모 기독교 언론은 사명삼아 주로 그런 비리나 흠결들을 메인기사로 제공하는데, 문제는 그 언론사가 아니라 그런 류의 기사가 끊이지가 않는 교계의 현실일 것이다. 기자가 무슨 죄인가? 그런 일을 저지른 사실이 문제인 것이지. 기자는 기자로서의 역할을 잘 하고 있을 뿐이다.
나도 이제 나이가 제법 무거워졌다. 나이가 많다고 명함을 내밀기엔 줄 맨끝에 서야 하지만, 젊은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서로 민망해 지는 나이가 됐다. 복지혜택을 주기 위해 국가가 정한 청년의 기준연령에서 벗어난지는 꽤 됐다. 나이는 이처럼 차곡차곡 들어가는데 그간 이룬 일도 없다. 솔로몬처럼 그럴듯한 성전은 커녕 작은 천막 하나 올려본 적이 없지만, 하나님의 평가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룬 것이나 이루어가고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 그 자체'라는 것에 오늘 묵상의 포커스를 맞추게 된다.
하나님에게는 우리의 열심과 소원과 업적이 그리 중요하지 않으시다는 것이다. 네가 무엇을 이루고 나에게 무엇을 갖다 바쳤든지, 그것이 얼마나 고결하고 선한 의도였든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수고했거나 굉장한 모험을 했든지,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신 것 같다. 하나님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살아가기를 제일 원하시는 것이다.
전도서의 기자는 모든 것이 찰나를 스치는 안개 같은 것들이라고 한다. 자신은 그 안개같은 삶 안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모든 지혜로운 생각들과 행동들과 위대한 업적을 이루려 하며 실제로 이루기도 했으나 결국 그것은 헤벨에 불과한 것들이라고 한다. 지혜자와 선인과 범부와 악인이 모두 하나의 길로 빠르게 사라지고 잊혀지니, 우리의 존재, 우리의 인생은 물론이고 그 안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그 성과와 아름다움과 추악함에 관계없이 '헤벨'일 뿐이라는 것이다. 영원하고 영속하신 하나님의 뜰에 거하는, '올람'의 일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닿을 수도 없는 먼지같은 것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신적 자기 희생을 통해 헤벨인 인간이 올람의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갈 길을 여신 그 분께서 인간에게 선포하신, 완성된 계명이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생명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해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되는 계명이다. 그리고 둘째 계명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
(마22:37~40/우리말)
첫번째 계명은 신명기 6장에 근거해 찾아볼 수 있고, 두번째 계명은 레위기 19장에서 찾을 수 있다. 세상 최초이자,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성전을 지어 올렸던 솔로몬왕을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은, 땅 위에 속한 모든 헤벨의 것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저 찰나에 지나지 않음을 일깨워 주는 듯 하다. 그것이 얼마나 선하든지 아름답든지 고결하든지 말이다. 다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자신의 음성을 청종하고 자신의 원하는 뜻에 따라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은 이웃사랑으로 증명된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따라 살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사는 것이기에 첫번째 계명도 함께 지키는 일이 된다. 또한 오늘 본문의 솔로몬이 들었던 것처럼, 그 자체로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런 마음으로 정직하게 살며 내가 명령한 모든 것을 실천하고 내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는 삶이 된다.
이렇게 묵상하는 시간은 오늘을 살아가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혹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고자 하는 시도들이다. 오늘 내가 깨닫는 바는 이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읆조렸더니(묵상), 하나님을 바르게 사랑하는 삶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을 내 자신처럼 여기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주변의 사람들이 다르게 인식된다. 여기 쓸 수는 없지만 내 주변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거주 거리가 가깝거나 정서적으로 가깝거나 일로 엮여있거나 마음으로 묶여있거나... 그 모두가 이웃이다. 나의 원수조차도 나의 주변을 구성하는 요인이라는 측면에서는 이웃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 모든 이들을 '내 몸처럼' 내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다. 제안이나 요청이 아니라 명령이고 율법이다. 한글성경은 이를 '강령'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내 주변을 구성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나와는 기질과 상황과 특색이 다르지만 저마다 연약함이 있거나 상처가 있거나 실수를 했었거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잘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어느 때 내게 조금 나쁘게 대했다고 해서, 어느 시절 나와 이해관계가 얽힌 적이 있다고 해서, 그들이 내 이웃의 목록에서 지워져야 할 일은 아니다. 그랬다면 나 역시 누구의 이웃 목록에도 끼지 못한 채 이미 누구보다도 먼저, 세상 고독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시니, 나 역시 누군가의 그런 사랑과 배려를 먹고 여기까지 살아왔음이 분명하다.
이제는 나도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한다. 누군가를 얼마만큼이든지 이해할 수 있다면, 누군가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볼 수 있다면, 그걸 고쳐내기 위해 분석하는 게 아니라 배려하고 용인하고 힘을 줄 수 있는 길을 생각해 보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싶다. 원수를 만들지 않는 삶, 모든 형제자매를 거룩하게 여기고 가족처럼 대하는 삶, 이웃된 이들을 나를 보듯이 감싸고 위하며 힘을 줄 수 있는 삶, 그런 삶을 살기 원한다. 그게 심지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한다면, 솔로몬의 성전보다 기뻐하시는, 인간에게 바라시는 공통되고 유일한 요구라고 한다면, 망설일 이유조차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