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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모츄 May 27. 2024

얄팍한 회개말고 진짜 삶을 통해

열왕기상 21:17~29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그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왕상21:27~29)


솔로몬왕 후에 두개의 국가로 나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 그중 북이스라엘의 왕이던 아합의 시대는 국가적으로 보면 융성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은 아합의 정치적, 경제적 업적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악한 왕 아합'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그가 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입장임에도, 탐욕스럽게 남의 포도밭을 강탈한 사건을 소개하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말씀을 전하고, 그의 같잖은 회개 제스쳐에도 반응하셔서 잠시 기다려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려진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이룬 업적이나 성과와는 무관한 것 같다. 다윗이 성전을 짓고 싶다고 했을 때도, 솔로몬이 크고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 바쳤을 때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초막 셋을 짓겠다고 했을 때도 성삼위 하나님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미에 보듯이, 악하디 악한 아합왕의 얄팍한 회개에도 그의 마땅한 형벌을 유예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며, 삭개오의 적극적이고 진지한 회개선포에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기쁨으로 표현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문득 성구가 하나 떠오른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50:23)


감사로 드리는 제사란 미사 혹은 예배같이 보여지는 행위를 통해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그게 원형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회개한답시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아 통곡을 한다해도 마음의 중심이 바르지 않다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도 아니기 때문이(이사야58:2~5). 행위로서의 예배참여에 어떤 신앙적인 유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게 드릴 있는 공식아니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좋겠다(공예배는 좋은 거다. 아무렴).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어찌 넓고도 깊은지 모르겠다. 아합왕이 뉘우치는 마음만 잠시 가졌어도 그만큼에 합당한 용서가 주어진다. 아합이 만약 히스기야나 요시야처럼 보다 적극적으로 돌이켰다면, 그가 지은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왕이나 요시야왕이 받았던 음성과 긍휼이 동일하게 주어졌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얄팍한 회개는 끝내 열매를 맺지 못한 나뭇가지와 같나보다. 잠시 가지치기가 유예될 뿐 농부의 심판이 눈 앞에 있다. 오늘 본문을 한 장만 넘기면 아합 왕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그는 주변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하는데,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아합 왕을 심판하시기 위한 하늘의 계획이라고 열왕기상 22장이 기록한다. 이를테면, 예고된 천벌이 결국 임한 셈이다.


삭개오와 아합의 다른 점이 있다면 삶으로 드러나는 회개의 열매가 존재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둘 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은 아니었다. 한 명은 왕으로서 국가적인 번영을 일구었고, 한 명은 부정축재를 통해 개인적인 부를 이루었다. 아합 왕은 선지자를 통한 심판의 말씀을 듣고 짐짓 회개하는 듯 했으나, 삶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았다. 반면 삭개오는 이렇게 말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4배로 갚겠나이다"(눅19:8)


신앙이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생각할수록 두렵고 떨리는 본문 말씀이다. 국가적인 부강, 외교적인 능숙함, 무역과 경제활동의 노련함, 그 모든 것을 갖춘 듯 보였던 아합의 업적은 하나님 보시기에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저 악한 왕에 불과했다. 그의 나라는 그의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모세의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나라이며, 그가 왕으로서 해야 할 가장 우선되는 책무는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청종하고 따르는 삶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복한 무역국가 시돈(페니키아)의 공주이자, 바알과 아세라를 두루 섬기는 여자와 결혼했고, 그녀의 이방신앙을 이스라엘에 퍼트리도록 놔두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죽이고 멸하는데 방관하거나 일조했다. 신본국가로의 토대 위에 세워진 이스라엘의 본질을 볼 때 아합은 그저 악했다고 평가할 수 밖에 없다.


내 삶은? 나와 가족을 위해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고, 사람들에게 맞는 처세를 하고,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고. 그래서 모든 것을 성실히 갖추고 노력해 가는 모습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내 겉모습, 세상이 좋다고 생각해 주는 어떤 항목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실로 아무것도 아닌 것(meaningless), 그저 죄를 짓지는 않는 상태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좋게 봐줘도 제로(zero)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삶의 일상성에 취해서 그저 흘러가는 중이라면, 어쩌면 서서히 타락해 갔던 솔로몬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갑자기 새로운 선교회에 입교하거나, 다시 신학을 시작하거나, 전도지 만들어서 노방전도라도 나가야 하는 것일까. 유튜브 영상에서 봤던 어떤 기독교 강사의 말처럼 세상 것에 가치를 두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선명하다. 그분이 원하시는 감사의 제사는 사도바울에 의하면 아래와 같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그리고 이어지는 12장 전체의 말씀은,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살라는 구구절절한 이야기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이다. 가진 게 없지만 없는대로 베풀 수 있고, 미움을 받더라도 미워하지는 않을 수 있고, 각자의 은사대로 서로를 섬기고, 겸손히 생각하고 행하며, 타인의 슬픔와 기쁨에 순수하게 동참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인내하고 살아가며, 설령 원수라 할지라도 곤경에 처하면 손내밀어주는 삶... 그게 사도바울이 이해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드릴 산 제사로서의 삶이자 예배다.


삭개오의 선언은 자기 재산을 매월 1/2씩 바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 그랬다면 그는 1년이 못되어 파산했을 것이다. 그의 파격적인 선언은 이전까지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 백성답게 살겠다는 초석을 닦는 고백이었다. 그간 행한 불의로 이룬 것들을 버리고 되갚고 새롭게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오늘날 누군가 가진 재물이 불의의 것이 아니라면, 굳이 4배로 헌금할 이유는 없다. 헌금할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빚진 자들에게 갚아야 할 일이다. 삭개오의 선언은 착취하던 삶에서 나누는 삶으로 돌아섬을 의미하고, 속이는 삶에서 정직한 삶으로 돌아섬을 의미한다고 보여진다. 로마서 12장의 사랑 나누는 삶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된 백성이 됐다고 하신 것도 이해가 된다.


얄팍한 회개...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서 눈물을 보이고 슬퍼하고는 뒤돌아서 여전히 이웃을 박대하고, 착취하고, 속이고, 나누지 않는 삶은 아합 왕의 결말과 동일한 것을 이룰 것이다. 악어의 눈물같은 회개에도 인자하신 하나님은 잠시나마 불쌍히 보시고 최대한의 수혜를 베푸시겠지만은, 결국 하나님 없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잘 살아야겠다. 가족과 친구들을 환대하는 삶을 넘어서고, 나의 숨과 배만을 위한 삶도 넘어서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삶으로 나가겠다. 바른 방법은 하나님이 알려주시겠지. 나는 결심하고, 실행만 하자. 답답한 분이 우물파실 거다. 내 어리석은 기도 가운데 성령께서 듣고 선한 계획을 세워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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