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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Jul 14. 2023

내 심장아, 이제 그만 멈추어 줄래? #71

후회는 우리를 과거에 갇히게 만든다.

정말 작은 걸로도 벌을 주고 싶어 하고,
아주 하찮은 걸로도 용서할 마음이 생긴다.




그동안의 나는 그랬었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분노에 휩싸이다가도 그 분노가 채 누그러지기도 전에,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심이 담긴 사과를 받은 경우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혼자가 되는 것이 무서워서 아무렇지 않은 듯이 그들과 다시 어울릴 수밖에 없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어떤 식으로든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사회생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닌 길은 굳이 가지 않기로 했다.




원래대로라면 내년 봄쯤 수술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정기검사를 제외하고는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제대로 걷기라도 했다면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봤을 텐데,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재활운동만이 답이라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운동을 하면 할수록 나아지기는커녕 이상함을 느끼게 되었다. 무릎 속 금속에 문제가 생겼다.

그저 뼈가 부러지기만 했으면 좋았을 테지만 무릎을 꿇은 상태로 뼈가 조각나서 조각난 뼈사이가 멀어졌었다. 그래서 그 당시 찍었던 사진에서 내 무릎은 가운데가 텅 비어있었다. 서로 거리가 멀어져 버린 뼈를 금속 핀으로 고정하지 못해서 결국 8자로 묶는 수술을 받았다. 부어있을 때는 몰랐지만 부기가 가라앉고 무릎이 안정되면서 가느다란 금속이 손으로도 만져졌고 이제는 눈으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뼈가 제대로 붙고 나서 운동량이 많아지면서 금속이 헐거워졌는지 점차 겉돌기 시작했고 매듭 부분이 피부를 파고들어서 피부를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뼈가 부러질 당시에도 피부는 찢어지지 않았지만 찔러대는 이번에는 왠지 불안했다. 피부 속의 뾰족함이 손으로도 느껴졌다. 피부를 찔러대다가 무릎을 굽히날카로운 바늘 같은 금속 끝부분이 피부 속을 죽 긁어댔다. 피가 고여 멍이 들었다가, 가려웠다가, 부었다가, 가라앉기를 무한 반복 중이었다. 이제는 낚싯바늘에 꿰인 고기처럼 가끔은 피부를 금속에서 빼내기도 해야 했다. 지난달 정기 검사 때, 이 불편함을 얘기하니 수술 일정을 앞당기기로 했고 9월쯤 수술 일정을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가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이곳저곳을 찌르다가 한 번은 신경을 건드렸는지 정말 아팠던 적이 있었다. 수술받은 후에도 잘 참았는데 그때보다 훨씬 더 아팠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 횟수가 늘어나자 9월까지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찔리기를 반복한 곳에는 커다란 혹이 생겼고 그로 인해 상처는 예전처럼 당기기 시작해서 무릎을 굽히기 더 힘들었다.

그래서 이번 주, 예약 진료일이 아니었지만 다시 병원을 찾았다. 또다시 불편함을 호소하자 담당 교수는 대뜸 금속을 당장 제거하자고 했다. 빨라야 8월이겠거니 싶었던 건데 내일이라도 당장 수술 하자고 하니 그 순간 멍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생일에 병원에 있고 싶지 않았고 나도 마음의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서 결국 일주일 후인 다음 주로 수술 일정이 잡혔다.

입원하기 전에 48시간 전, 코로나 음성확인서를 제출해야 했다. 기나긴 코로나 시국에도 코로나 검사를 받아본 적 없는 내가 이제 와서 PCR 검사를 받으러 가야 했다.

결국 금속 제거 수술을 8개월이나 앞당겨서 하게 된 셈이다.




이른 아침의 전화벨은 언제나 두려웠다. 반가운 전화가 아님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며칠 전,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계속 우시면서 자신의 며느리가 암에 걸렸다며 슬퍼하셨다. 6개월 만에 태어난 조카는 영구 장애가 남았고 가족들 모두 돌아가며 그 아이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어린 아들이 비행을 견딜지 못할까 봐 지난 6년 동안 여행 한번 다니지 못했던 동생네였다. 그런데 이번 추석 연휴 때는 부모님과 함께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짧은 비행을 무사히 견디면 다음엔 해외여행에도 도전해 보겠다며 들떠 있었지만 그 소식을 들은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전해진 소식이라 마음이 더 쓰였다.

올해는 무얼 해도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의욕조차 사라지게 만든 소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어머니에게 수술 일정을 알리지 못하고 혼자서 입원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수술이 끝나고 호전되는 대로 동생네로 가서 집안일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다.

'시'자가 붙은 사람이 내 집에 와서 함께 지내면, 나라면 싫을 것 같았는데 평소 올케는 나에게 함께 자고 늘 말했었다. 좋은 의도로 그랬다고는 하나 그것도 서로 맞아야 같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동안 여러 번 거절했었다. 그러다 올케와 나 사이에 금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걱정도 되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작은 도움도 필요할 테니 여행을 할 수 있을 때까지만 함께 지내면 어떨까 싶었다. 그래봐야 9월이나 되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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