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봄 Apr 28. 2020

영화 <툴리>: 기만적인 해피 엔딩  





개봉 당시에 영화를 먼저 본 친구가 '육아 현실을 진짜 리얼하게 담고 있다'며 꼭 보라고 추천했는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보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말하자면 한숨 좀 돌리고 있었달까? 영유아기의 아이를 키우는 한참 힘든 시기를 지나, 초등학교 입학과 적응이라는 거사를 무사히 마치고 약간의 여유를 느끼고 있던 터라 굳이 영화를 보면서까지 지나온 힘든 시간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이 영화를 잊었다. 그랬는데  최근에 코로나19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넷플릭스를 자주 시청하게 되었고, 며칠 전 메인 화면에 뜬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고 친구의 추천이 떠올라 클릭해서 보게 되었다. 



소문대로 샤를리즈 테론의 연기는 정말 대단했다. 아이 셋을 키우는  현실의 육아맘을 조금의 꾸밈도 없이 리얼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이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 22kg이나 살을 찌웠단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도 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로 분하고 보니 평범한 우리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녀가 맡은 마를로라는 캐릭터는 나를 숨 막히게 했다.  나를 화나게 했고, 결국엔  슬프게 했다. 



77년생 42살의 (2018년 기준) 마를로는 세상이 말하는 참 좋은 엄마이자 아내이다. 그녀는 책임감 있고, 이해심이 많으며, 친절하고, 인내심이 강하고 또 희생적이다. 그래서 군말 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낸다. 셋째 아이를 출산하기 직전까지 두 아이를 돌보며 만삭의 몸으로 회사에 출근하는 워킹맘이었고, 아이를 낳고는 전업맘이 되어서 아침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24시간 주 7회, 그러니까 연중무휴 체제로 교대도 없는 풀타임으로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서 하는데도 아무 불만 없이 성실하다. 그렇다, 그녀는 불만이 없다! 다만 너무 피곤할 뿐! 정말로 피곤하지만 않았다면 그녀와 가족의 삶에는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렇게 하는 사는 게 매우 마땅하다고 믿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전혀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마를로와 장애가 있는 둘째 아들 


환상이 만들어낸 야간 보모 툴리 





엄마 없이는 아직 양말도  스스로 챙겨 신지  못하는 큰 애와 장애가 있는 작은 애를 혼자 돌보며 갓 태어난 막내의 밤중 수유까지 해야 하는 마를로는 한계에 도달한다. 출산 전 마를로의 부유한 오빠는 자신이 비용을 댈 테니 나이트 타임 보모를 고용하라고 했지만 마를로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인생을 남에게 하청줄 수는 없다'며 육아의 책임이 전적으로 엄마에게 있다는 믿음을 굳게 붙든다. 그랬기에 한계에 봉착한 그녀가 낸 해결책은 진짜 보모를 고용하는 게 아니라 환상 속의 보모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마를로의 환상이 만들어낸 젊고 유능한 보모 '툴리'는 마를로에게 그녀가 원했던 삶 - 유능하고 완벽한 엄마이자 아내의 삶- 을 살 수 있도록 돕는다. 툴리 덕분에 집안은 늘 청결하고, 아이들은 더 이상 냉동식품을 먹지 않는다. 낮에 아이들과 잘 놀아줄 수도 있고, 예쁘고 맛도 좋은 수제 간식을 만들어 둘째 아이의 반 친구들에게 돌릴 수도 있다. 심지어 '에너지 충전'이 필요한 남편을 위해 특별한 섹스 이벤트도 실행할 수 있다. 이렇게 살면서  마를로는 자기 삶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다. 자기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아내이자 엄마인 여성에 대한 남성 가부장제 사회의 무리한 요구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그 요구에  완벽하게 부응하려고 최선을 다할  뿐이다. 





남편 드루의 게임하는 모습 





이런 마를로를 보면서 내가 가장 기가 막혔던 점은 바로 그녀가 남편인 드류에게 전혀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를 억지로 참는다거나 말해봤자 소용없으니까 포기한 게 아니라 정말로 화가 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래서 이 영화가 여성의 육아 현실을 다루는데도 남자들에게 욕을 안 먹고 호평을 받는 게 아닐까 싶다.) 이제 막 출산해서 밤중 수유를 하느라 힘든 아내를 옆에 두고도 침대에서 매일 밤마다 혼자 게임을 하고 있고, 아내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무관심한 남편인데도 마를로는 남편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짜 한 번쯤은 게임기를 뺏어서 집어던질 법도 한데 말이다.  마를로의 생각은 나와 다르다. 그녀는 부부 관계에 대해 묻는 툴리에게 ‘내가 남자 하나는 제대로 골랐지’라고 말한다.  남편도 밖에서 일하느라 힘들었고, 집에 와서는 좀 쉬는 게 마땅한데 여기에 화낼 일이 뭐가 있겠나? 퇴근하고 집에 와서 애들 자기 전에 책도 읽어주고, 잠자리도 봐주는데 고맙지. 애 키우는 건 원래 여자 몫이니까 몸이 부서지든, 정신이 망가지든 당연히 모두 내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인 거고.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부부 싸움 장면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마를로는 자라는 동안 엄마가 세 번이나 바뀌는 경험을 했고, 그런 탓에 좋은 엄마이자 완벽한 아내가 만드는 안정적인 가정에 대한  남다른 갈망과 욕구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이해를 하려고 해도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려고 하는 그녀의 태도는 도가 지나치단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무튼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 환상이 영원히 유지될 수는 없다. 툴리의 도움으로 말 그대로 환상적인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마를로는  툴리의 제안으로 함께 브루클린으로 밤 외출을 감행한다. 브루클린은 마를로가 리즈 시절에 살던 동네다. 근  10년 만에 찾은  옛 동네에서 그녀는 격세지감을 느끼며 툴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의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한다. 툴리가 보모 일을 더는 할 수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툴리의 떠남을 받아들이기 힘든 마를로는 괴로워하며 몸부림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졸음운전으로 차 사고를 내 강물에 빠지고 만다. 이렇게 마를로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되돌아오면서 툴리의 실체가 드러나고 그제서야 남편 드류는 아내가 벼랑 끝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뭐 반성하고, 그 후로는 집안 일을  조금 더 돕게 되었다는 그런 해피 엔딩이다.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서 드류를 부엌에서 요리하고 있는 아내의 곁에 나란히 서게 함으로써, 즉 그들의 사이좋은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모든 일을  분담하며 참된 동반자로 살아가는 부부의 모습을 암시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엔딩은 내게 거짓 낭만으로 보일 뿐이다. 무엇이 정말로 달라졌는가? 독박육아로 정신이 나간 아내가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동으로 죽을 뻔하자 그제서야 깜짝 놀라 집안 일을 돕기 시작한 남편이 진정으로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이 약발이 얼마나 갈지 의문이다. 이 사건으로  그가 아내 혼자서 무척 힘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지는 몰라도, 가사와 육아의 책임이 자기에게도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는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를 슬픈 분노 속에 낙담하게 하는 것은 마를로다.  



마를로는 죽다 살아났음에도 아무런 깨달음이 없다. 자기가 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가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데 남편 드류가 다가와 사과하는 장면은 내게  아픔을 주었다.  드류가 "이렇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해." 라고 사과하는데 그러자 마를로는 놀란 눈빛으로 그를 위로하듯이 "자긴 아무 짓도 안 했어." 라고 대답한다. 그 순간 정말로  내 머리 속이 하얘지고 말았다.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갔던 삶의 방식과 환경에 대해 그녀가 끝까지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누구의 책임도 묻지 않는데 거기에 어떤 개선의 여지가 있겠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야, 마를로. 너는 그렇게 말해서는 안 돼. 나는 마음 속으로  마를로의 대사를 고쳐보았다.  "그래,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야." 는 어떨까. 남편을 너무 비난하는 말로 들리나?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그래, 뭔가 잘못 됐어.  우린 뭔가를 바꿔야 해." 너무 급진적인가? 그렇다면 "응, 내가 많이 힘들었나봐.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게 모두에게 좋을지 생각해보자." 는 어떨까?



... ... 어떻게 그 순간에  "자긴 아무 짓도 안 했어." 라는 말을 할 수 있나? 당신도, 사회도, 그 누구도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이렇게 된 건 그럼 다 내 탓이란 뜻인가? 솔직히 남자도 아닌 여자가 어지간히 가부장적인 남자들보다 더 보수적인 태도로 말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정내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노력이 물거품처럼 느껴졌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당최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며  기운이 쭉 빠졌다.  죽었다 살아났지만 마를로는 특별히 남편이 이전과 달라지길 바라는 것처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남편은 알아서 깨닫고 집안 일을 돕기 시작했으니 무척 고맙고 행복할지 모르겠다.  마를로 같은 여자가 볼 때 나는 어떤 여자일까? 



브루클린의 밤거리에서 괴로워하는 마를로에게 그녀의 젊은 자아이자 분신인 툴리는 말한다. "실패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꿈을 이루신 거예요." "가족을 위한 당신의 단조로운 일상은 모두에게 소중한 선물이에요." 마를로에게 어머니와 아내로서 희생적인 삶을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가라고 독려하는 이런 메시지는 다른 곳이 아닌 그녀의 내면에서 솟아나온 말이다. 괴로워하면서도 마를로는 그저  '30대는 새벽 쓰레기차처럼 찾아온다'고 말할 뿐이다.   결혼하고 아이가 있는 30대 여자의 삶은 '쓰레기차' 같아야 한다고 누가 정했나?



마를로는 내게 넘사벽처럼 느껴졌다. 그 동안 내가 같은 여자 사람들에게서 무수히 들어왔던 핀잔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여자가 해야지!', '에이 그래도 여자가 참아야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아직은 그렇잖아...'  같은 말들이 환기되면서 마음이 아팠다. 더욱이 이 영화가 해피 엔딩의 모양새를 하고 있어서 나는 외로워졌다. 이 정도면 만족할만 하지 않냐는  무언의 압박이 친절한 미소를 띠고 내게도 동의할 것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누구를 위한 해피 엔딩일까? 영화는 끝났지만 질문은 계속된다. 만약에 마를로가 살아나지 못하고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툴리와 마를로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