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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el Jan 11. 2023

실패의 경험

졸업을 할 당시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4학년 여름방학 때 유럽배낭여행을  떠났다.  안되면 대학원을 가야지라고 생각을 했었던 듯하다. 4학년 2학기 진로결정을 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명확하지 않았다. 취업전선에 뛰어들기 위해 토익시험을 보던 친구들과 달리 나는 무엇을 매료되었던 건지 대학원 준비를 하겠다. 결심을 했었다. 존경했던 선생님의 권유도 있었지만 자기 객관화가 안된 나는 끌려다니듯 고민 없는 선택을 했었다. 부모님이 취업을 무조건 해야 한다는 경제적 어려움의 상태도 아니었기에 더 나태했던 듯하다. 주변에 선배와 동기들은 입사시험을 치르느라 바빴다. 나는 대학원 준비를 1년 정도 하였다. 미술사를 공부하고 싶어서 준비를 하고 실패한 이후 혹독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1년의 공백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듯하다 원서를 쓸 때마다 1년의 공백을 어떻게 적느냐 고민했던 듯하다. 방송사와 공기업 준비를 하던 나는 결국 최종에서 여러 번 떨어진 후 결혼을 했다.


이탈리아 유학을 떠난 선배(현 남편)와  국외 장거리 1년과 국내 1년 장거리 연애 끝에 결혼을 했고 깔끔하게 내 취업 도전은 중단되었다. 비정규직 대학교 행정직원으로 일을 하다가 결혼을 하였다. 결혼한 이후 교육시민단체로 연구원이라는 직책을 얻어 내 인생의 정규직 출근을 했다. 많은 직장동료와 선배들을 만나면서 내 시야는 넓어지기도 했고 좁아진 부분도 있고 몰랐던 내 자신을 찾는 시간이기도 했다. 생각하지 못한  NGO 비영리단체에서의 경험들은 기존에 내가 추구하던 직업과 노동시장에서 새로운 섹터로의 이동이었던 듯하다. 남들이 다 뻔하게 선호하던 라인을 조금은 벗어났지만 그 안에서 서서히 적응하고 물들어 가던 시간들이었다.  퇴사한 5년이 넘은 시점에서야 좀 더 너그럽지 못했던 나 자신을 알게 되었지만 아마 다시 근무를 했다면 똑같은 답답함과 억울함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사회든 일하는 놈년, 내빼는 놈년은 존재하는 게 인지상정이라면 지금쯤이면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약삭빠르게 살았으려나 모르겠다.


지금도 생각하면 얄미운 동료가 몇몇 있는데, 같은 임신인데 누구는 신기할 정도로 일을 내빼고 생색내는 일에만 있다 육아휴직도 훨씬 일찍 쓰면서 편하게 월급 받는 년이 있었고 나는 바보등신같이 야근하고 출산일자 보름 남겨두고 출산휴가 얻었었다.  그 년은 여전히 일하고 있고 애셋을 낳고 3년의 육휴를 하고 여전히 일하고 있다. 무능력하고 나쁜 년은 끝까지 남아서 일하고 있고 내가 애정하고 마음이 맞던 동지들은 현재 그 단체에 남아있는 이가 없다. 일찍이 털고 나와서 더 멋진 직장에서 근무하는 친구들이 많으니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고 얘기하고 싶기도 하다. 글을 써보니 너그러워진 것은 아닌듯하다. 그런데 다시 그 년을 만난다면 반갑고 이해하는 시선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 본다.

 


현재 섬으로 삶터를 옮긴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식당을 그만두자마자 다시는 이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몇 개월 다시 취업준비를 했다. 주변에서는 수고한 나에게 마음껏 놀고 쉬고 즐기라고 많이 권했는데 이를 다 무시하고 현재를 벗어나기 위해 2달간 토익과 한국사시험을 만들어놓았다. 예전의 실패의 경험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재미있게 준비했었다. 20대에 만들어놨던 토익성적과 여러 기사 자격증들 중 유효한 것은 2개였다. 정보처리기사, 산업정보기사라는 내 전공과 무관하지만 가산점이 될 수 있는 자격증 단 2개에 운전면허증(?). 도전과 경험들은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데 아직까지 그걸 느끼지는 못하겠다. 쓸데없는 것은 끝까지 쓸데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해 본 나의 취업 준비는 단 4개월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여러 부분이 있었는데 당장 이 섬을 탈출할 수 없다는 것과 이깟 이 정도의 노력과 시간으로는 탈출할 수 없다는 현타가 온 순간 며칠을 끙끙 앓고 포기했다. 책장 한 켠에 남아있는 수험서는 여전히 아리게 아프다. 실패의 경험을 넘어서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이렇게 무너지는 건가 싶어서이다.

 

 그리고 현재 10월. 나는 다시 식당준비를 하고 있다.  공동대표인 남편과 평생 싸워도 이보다 많이 싸우지 않았을 만큼 4년간 싸워가며 식당을 운영했고 그래서 절교를 선언했지만 다시 우리는 재결합을 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새로운 건물을 샀고 다시 준비한다. 생각보다 이전 식당은 꽤나 잘 되었다. 그래서 다음 버전의 식당도 더 잘되어야 한다는 부담도 생기고 이전의 수입을 포기하지 못한 나를 보며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이곳을 탈출하는 시기를 조금 더 늦추기로 했다.



나는 가끔씩 여전히 상상을 한다. 어느 아름다운 유럽 소도시 한가운데서 동양인부부가 사는 상상을. 대학시절에는 졸업한 이후에는 해외에서 살고 싶다고 꿈꿨었다. 유학생활을 하고 외국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싶다는 상상을 하면서.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넓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이상적인 소원을 담았었다.  현시점에 비슷하게나마 이루어진 점이라면 남편이 이탈리아 유학을 했다는 점과 1년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하고 있다는 점외엔 내가 꿈꾸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누구나 실패의 경험을 하고 살고 있긴 하겠지. 누군가에게는 실패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을 테고 상대적인 비교로 실패의 경험이 쌓이면 심리적 스트레스는 더 커진다.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는 이들이 있고 객관적으로 실력이 안되어 보임에도 환경적 상황으로 쉽게 성공을 거둔 사람이 가진 자신감 앞에서 나는 무너질 때도 많았다. 실력도 안 되는 것들이 깝죽거리는 것을  보고 분할 때도 많다. 그러나 그들의 운이었겠거니 혹은 내가 모르는 능력 있는 자였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내 상황들을 보고도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꽤나 나는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있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너는 말은 그렇게 하는데 은근히 보면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고 말하는 것도 들었다.  그런데 나는 특출한 능력이나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성실, 노력밖에 없으니 시간이 만들어주는 성실함으로 쌓이는 보통의 능력정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성공한 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갖고 살았던 듯한데 마흔이 넘은 시점에서는 내 미래의 불안함을 감출 수 있는 안정된 마음과 경제력을 갖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안정감과 충족함을 주고 싶다. 사랑을 그리고 내 아이가 바르게 자라날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근에 내 성실함으로 만들어내는 결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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