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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lphin knows Feb 06. 2024

다른 나라에 태어났더라면

천 년의 주령구 10

지연이의 부모님도 은근히 나를 챙겨주셨다. 가끔 지연이가 쇼핑백을 던지면서 "야 엄마가 원뿔원 했대"라고 말했고 쇼핑백을 열어보면 어떻게 알았는지 발에 맞는 운동화와 편안하고 예쁜 트레이닝 복이 들어있었다. 피식 웃었다. 원뿔원은 무슨. 일부러 고른 나는구먼. 

그냥 심드렁하지만 확실하게 집에 자꾸 오라고 하고 엄마랑 먹으라고 뭘 싸주고. 

지연이의 무탈함은 나를 안심시켰다. 엉뚱하고 취향이 특이했지만 그 애를 자라게 한 무해한 환경 덕인지 그 애와 있으면 세상이 안전할 수도 있겠단 생각. 뭐 그러다가 지연인 갑자기 SCP나 크툴루신화 등 온갖 괴수물의 이름을 줄줄 이야기하느라 나를 집에도 못 가게 할 때도 있었고. 가끔 내 공책을 몰래 가져다가 이상한 낙서를 그려놓기도 하고. 주머니에 캐릭터 말이나 주사위를 몰래 넣어놓기도 하고, 하여튼 그랬다. 자기가 좋아하는 게 확실하니 굳이 남에게 관심을 가질 일이 없었다. 나랑 친해진 계기는 그 애가 그려대는 괴물딱지가 어느 순간 매력 있게 보였는데 그걸 있는 그대로 매력 있다 칭찬해 버리니 긴 시간을 그 괴물의 형성과 생태와 발전 세계관까지 아주 긴긴 시간을 말했다. 그리고는 집에 데려오고, 뭐 그렇게 되었다.  가끔은 수업시간에 뜬금없이 내 책상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심오함을 이해하는 자여, 괴물과 모험의 세계에 초대하노라' 

엄마의 말이 맞았다.

"주위 사람이 잘 되고 무사한 게 결국 네게 도움이 돼. 주위가 무탈한 걸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 전달되고 그게 사람 사이를 단단하게 하더라고. 내 동생, 그러니까 너네 외삼촌이 그런 사람이었어. 반면 제일 멍청한 사람은 고작 순간의 기분 하나를 이기지 못해서 멍청하게 남 깎아내리는 사람."

무탈하다. 이제껏 이 '무탈'이라는 말이 얼마나 귀한 말인지 깊이 공감하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목이는 이 말의 무게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주 목이를 찾아가 '무탈하냐'라고 묻는 수밖엔 없었다.


목이는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다 해주었다.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 지금 사회면에서도 함부로 표현하기 힘든 일들이 내 눈에 그려지도록 설명했다. 그때는 뭐 미성년자나 어린이 보호의 개념이 지금보다 더 없었을 시절이니. 워낙 신비하게 등장한 친구였지만 특유의 초탈함과 놓아버린 듯한 분위기가 있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해 줄말을 찾기 힘들었다.

"어떻게 버틴 거야?"

목이는 숨을 푹 하고 내쉬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버텨봤었어. 매일 밤 나에게 엄마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야기를 해줬으니까. 그리고 이게 있었어"

주머니에서 유리잔 하나를 꺼냈다.

"와!"

푸른색과 초록색이 도는 유리잔. 모양은 단순했지만 거기에 새겨진 야자나무 잎사귀는 꽤 섬세했다. 지금 써도 될 만큼 예뻤다.

"이게 뭔데?"

"아 이거 내가 어떤 사람 고쳐주고받은 거. 내가 이모와 역에서 일하고 있었을 때 외국 사람들이 자주 왔어. 페르시아나 인도나 당나라 사람들은 많이 왔는데 비잔틴 사람은 처음이었거든."

머릿속에 지도가 그려졌다. 아 동로마. 와. 진짜 신라 엄청 글로벌했구나.

"덩치만큼이나 눈과 코가 크고 머리가 곱슬거렸던 그 사람은 신라의 음식과 공기가 잘 안 맞았는지 역에 오자마자 심하게 앓았어. 그런데 같이 온 일행들이 양심도 없이 그 사람이 아프자마자 그냥 버렸더라. 이모와 나는 화가 났어. 아프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서로 밤새 술을 나누며 노래를 부르고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이역만리에서 이럴 수가 있나 싶어서. 이모와 나는 화도 나고 측은해서 나와 함께 그 사람을 잘 돌봤어."

"여기나 거기나 참 통수는 똑같구나"

"여기저기 약방을 찾아 약초를 구하러 다니고 열 떨어지게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아. 대추야자라고 알아?"

"아 잠깐만 검색할게"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니 야자수 나무와 그 열매가 떴다.

"맞아. 이거"

"약방을 찾아다녔는데 거기에 페르시아 출신 사람도 일하고 있었어. 그 이야길 하니까 이 열매가 담긴 꾸러미를 내주고 먹이라더라.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니까 그거라도 하자 해서 당장 사 왔어. 꽤 비쌌지만. 다행히 약값을 했는지 그 사람은 건강하게 일어났고. 나에게 이 잔으로 보답을 해줬어."

"멋있는데?"

"전혀 기대를 안 했대. 자기와 같이 다니던 사람들이 그렇게 할 줄은 몰랐다고. 친구라고 부른다면 나를 친구라고 부르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이렇게 귀한 물건을 넘긴 거야. 이건 왕이나 월성사람들이나 쓰는 건데... 그 사람이 나에게 라틴어를 가르쳐 주기도 했어. 일부러 그렇게 오래 머물 필요는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나를 돌보느라 오래 머문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거든. 숙박비도 제대로 잘 챙겨줬어. 나름 이름난 상인이었던 거야. 같이 있었던 친구들은 그 상인연합체 사람들이었고."

머릿속에서 그동안 봤던 다양한 장면들을 조합해 봤다. 내가 들은 어떤 이야기보다 귀가 솔깃했다. 집에 가서 목이가 한 이야기를 조합해서 ai에 그림 좀 그리게 해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목이는 그 잔을 손으로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그분이 역을 떠나 돌아가는 날 나는 작별인사를 못하고 숨어있었어. 만약 마지막 모습을 봤다면 나는 그분께 나를 데려가 달라고 울며 떼를 쓸 것 같았거든. 그런데 그러면 남아있는 우리 이모가 너무 불쌍하잖아. 그 사람이 내 아빠였으면 어땠을까 싶었어. 내가 비잔틴에 태어났고 그 사람 아들이었다면 몸이나 마음이나 이 지경이 되었을까? 또 엄마는 끝까지 살았겠고...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나를 월성에 가둔 그분은."

목이가 쓰게 웃었다. 

"그나마 이건 어떻게 잘 감췄고, 힘들 때마다 이걸 봤어. 나를 사심 없이 돌보고 고마워해준 사람이 있었고 언제든 자기가 필요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와서 널 돕겠다는 말. 내가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말을 해줬다는 게 내게 버틸 힘이 되었어. 그렇게 겨우 맘을 다독거려 놓으면 그분이 나를 불러내고 또 그랬지."

목이의 애비를 보고 싶었다. 만약 마주할 수 있었다면 커터칼을 꺼내어 얼굴에 칼자국이라도 내놓았을 것이다. 내 아빠가 내 등을 그렇게 유리로 벤 것처럼 말이다. 

"난 세상에서 우리 아빠가 제일 답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너의 그... 아빠?라고 불러도 될까? 그냥 인간이라고 할게. 인간만 한 쓰레긴 못 본 거 같아. 도대체 위해 그렇게 한 거야?"

"월성에서 살다 보면 보이는 게 있어. 어떤 사람들은 모두에게 퍼져야 할 물줄기를 막아서고는 자기가 물줄기의 주인인 행세했어. 물줄기를 자기 쪽으로만 틀기 위해서는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없애야 했고, 효과적으로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사술의 힘을 빌려야 했대. 각간 김위홍, 그리고 그의 아내였던 부호부인이 그런 사람이었어. 처음에는 사술을 모르고 그저 사람들 사이를 숨어 다니며 이간하고 무리를 짓고 그냥 사람이 하는 짓을 하다가 힘이 부쳤나 봐. 하슬라에서 부호의 부탁을 받고 자기 아들과 그 마을 양민의 목숨을 바꿔치기하는 사술을 하고 있었던 그 사람, 아빠를 만난 거야. 거기서 모든 일이 시작되었고 나는 여기로 왔어. 월지에서 주령구를 굴려대며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댔는지 몰라. 가끔은 기억의 일부는 지웠으면 좋겠어. 그런데 자꾸 또렷해져"

"주령구?"

또다시 검색해서 폰을 보여줬다.

"아직도 사람들은 이걸 아는구나."

"이거 그냥 술놀이 할 때 쓰는 거 아니었어?"

"그랬는데 아빠가 용도를 바꿨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죽이고 피에 담가서 여기에 온갖 무섭고 끔찍한 능력. 그걸 가진 존재를 담아버렸어. 대가만 지불해 주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모든 것을 다 해주는 것들을. 아직도 그 피냄새가 나. 엄마가 거기에 필요했던 것 같아. 엄마를 닮은 나도. 엄마는 그 일에 이용당하는 걸 싫어해서 그걸 정말로 싫어하고 없애려 했어. 어떻게든 그러다가 결국..."

지금껏 차분하게 모든 일을 설명하던 목이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를 꽉 깨물고 온몸을 부들거릴 정도로 화가 나고 억울하고 답답하고 하는 일. 그걸 해결하지 못하고 천 년이 넘게 버텨왔던 거다. 

상상을 할 수 없다. 다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었다.

"도울 방법을 모르겠어서 확실히 말은 못 하겠지만 적어도 같이는 있을게. 잘은 모르겠지만 최대한 그럴게."

목이의 손을 잡았다. 목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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