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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lphin knows Jan 25. 2024

내가 금이라고 하면 금인거야

천 년의 주령구 09

만왕이 아직 왕후뱃속에 있었을  부호부인은 남편 김위홍과 함께 주술사를 불러들였다. 김위홍과 부호부인이 원하는 건 오래오래 고귀하게 사는 것. 서로가 서로를 아끼거나 사랑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한 배를 탔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원하는 걸 누리기 위해 힘을 합쳤다. 부호부인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고 김위홍도 부호부인도 그걸 잘 알았다. 왕가의 사람이지만 자손을 가질 순 없었으니 다른 미래를 꿈꿀 수 없다고 생각하고 생전에 뭐든 최고로 누리고 싶어했다. 그래서 어떤 일이든 무엇이든 했다.

주술사는 그들에게 말했다.

'가장 고귀한 이를 그의 핏줄과 분리시키라. 그러면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루리라'

김위홍은 알고 있었다. 왕후인 영화부인은 그저 묵묵하고 성실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아내인 부호부인은 달랐다. 아담한 몸매에 고혹적인 분위기를 지닌 부호부인은 자기를 성적으로 돋보이게 꾸밀 줄 알았고 몸을 치장하는데 절대로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날마다 산과 들로 말을 타고다니며 절대로 살이 붙지 않게 몸을 관리했다. 언변 그리고 여러 부분에서 창기 못지 않게 남자를 홀릴 줄 알았다.

영화부인의 산통 전 부터 산통이 한창일 때까지 꼬박 이틀 간을 경문왕은 김위홍의 처소에서 부호부인과 함께 있었다. 마복자(임신한 아내를 윗사람에게 바쳐 자기 아이를 높은 신분의 아이로 세탁하는 신라 풍습)를 만들 것도 아니면서 임신도 하지 않은 부인을 자신에게 기껍게 바친 동생 김위홍과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몸이 부서져라 섬긴 부호부인에게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그 둘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 생각이 들었다.

만왕이 태어나자마자  경문왕은 영화부인 김씨에게 '이 아이의 어미가 아닌 나라의 어미로 살아달라'고 명했다. 영화부인은 경문왕의 말을 '국모로써 잘하고, 나에게 집중해라'라는 말로 해석했다.

비통한 마음도 잠시,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부호부인에게 아이를 맡겼다. 보고싶을 때도 많았지만 월성 곳곳에는 눈이 많았다. 아이의 어미노릇을 온전하게 할 수가 없으니 경문왕의 제수인 부호부인에게 맡겨진 아이가 무사하기를 빌며 거의 월성 안에 차려진 작은 사찰에 틀어박혀 조용히 지냈다. 가끔 직접 바느질을 하고 수를 놓아 지어 부호부인에게 편지와 함께 보냈다. 궐에서 멀찍히 그 옷을 입고 있는 만왕을 보면서 안심했다. 그러다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전해지는 말로는 부호부인이 권한 차와 다과를 먹은 뒤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일은 알 길이 없다.


부호부인은 마음을 둘 곳이 없었다. 한 배를 탔지만 남편 김위홍이라는 작자는 야비하고 문란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며 부인을 그저 도구 취급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이 여자 저 여자를 건드리고 다녔다. 나쁜 버릇이 있었는데 꼭 지인의 어린 딸을 건드리고는 뒷수습을 부호부인에게 시켰다. 많은 재물이 필요했고 때로는 직위도 필요했다.

할 수만 있었다면 부호부인도 김위홍을 높은 사람에게 바쳐서 원하는 걸 얻어냈을 텐데, 부호부인이 봐도 김위홍이 강제로 범하지 않는 한 김위홍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같았다. 그가 가진 왕의 동생으로서의 지위가 탐난나면 모를까. 내심 차라리 자기 대신 다른 이들과 놀아나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처음에 그의 배필이 되었다고 듣게 된날. 과연 자기가 그를 받아들일만큼 비위가 강할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수습할 때가 되면 김위홍은 특유의 말솜씨로 경문왕을 잘 구워삶아 문제를 제기한 억울한 아비나 오라비, 어미들을 오히려 모함을 한 자로 몰았다. 귀족이면 월성에서 쫓아냈고 힘이 없는 백성이면 죽여버렸다.

부호부인은 거울을 보고 몸을 단장하길 좋아했다. 아니 그렇게 키워졌다. 진골 그 중에서도 대원신통이라는 이름 난 핏줄, 타고난 색기가 그 모든것을 부채질 했다. 그의 방은 온갖 패물로 가득했다 왜에서 가져온 조개껍데기로 만든 머리장식, 로마에서 건너온 유리로 만든 귀걸이와 팔찌, 옥, 산호, 금, 비단 모든 것이 그득했다. 그렇게 많은 것을 걸치고 놀아도 마음은 허했다. 무엇보다 자기보다 자질이 뛰어나지 않았는데도 왕후가 영화부인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럴때면 외모가 뛰어나고 젊은 사람들을 월지에 잡아들여 김위홍 못잖게 그들을 도구삼아 추잡하게 놀며 기분을 풀었다. 어느때부터였을까  '어린애인데도 보통이 아니라며' 부호를 쳐다보고 쓰다듬던 집안 어른과 주위 사람들. 그걸 부추켰던 부모와 숙모들 때문이었을까? 영화보다는 여기저기 구경도 많이 다니며 패물을 받을 일이 많았지만, 그저 아이답게 놀고 묵묵히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어도 되는 영화가 부러웠다. 자신을 무릎에 앉힌 먼 친척어른이 '영화는 너같은 매력은 없다. 그냥 애다'라고 하는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영화와는 달리 부호는 몸을 잘 꾸밀때만 칭찬을 받았다. 다른 것은 다 소용이 없었다. 수를 잘 놓아도, 공을 잘 던져도, 가끔 글씨를 잘 써도 관심을 받을 수 없었다. 뭐가 중요한지 알라고 그 길을 따르라고 주위 여러사람이 부호에게 계속 목소리를 내고 실제로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아이를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그 동안 했던 추잡한 짓들을 멈추게 되었다. 왕의 특별한 취향을 맞춰주느라 고생을 좀 했지만 결국 그 영화부인의 아이가 자기에게 온 것이다. 부호부인의 인생에 몇 안되는 성취였다. 영화부인의 그 말간 얼굴에 어둠을 들인것이 바로 자신이었고 또, 그 아이는 나중에 왕이 될 공주였다. 아기의 몸짓과 눈빛 하나하나가 헛헛함을 채워주었다.

한 동안은 괜찮았지만 영화부인이 옷과 함께 보내는 그놈의 편지가 문제였다. <약한 이를 생각해라. 바르게 살아라. 너는 고귀한 핏줄이다. 맑고 밝은 너의 얼굴을 보면 내가 지은 옷을 입고 있는 너를 보면  비천을 보는 것 같다>라는 왕후의 편지가 속을 뒤집어 놓았다.

'와 네가 뭐가 다른가? 뭐가 다르다고 귀한척 가식을 떠는가?'

아이가 웃을때 영화부인의 얼굴이 보였다. 무표정으로 있을땐 자기를 그 이틀간 또 이후로도 맘대로 불러낸 시아주버니인 경문왕의 표정이 겹쳐졌다. 누가 알 것인가 아마 영화부인도 왕이 그토록 짐승만도 못한 사람임을 알 일이 없었을거다. 배필과 바쳐진 물건 사이엔 건널 수 없는 큰 구렁이 있다. 자신이 때론 통증과 모욕감을 감수하며 그림자를 감당할때, 영화부인은 그 나머지만 거들면 되었다. 월성의 모든 이들에게 조심스럽고 귀하고 예의바르게 대해졌으니 말이다. 모두 왕후를 귀히 여겼고, 왕도 그걸 모를만큼 멍청이도 아니였다.

'그러니 눈이 저렇게 멍청하게 해맑기만 하지.'

그리고 누군가에게 바쳐질 일도 없고 김위홍같은 인간과 엮일 일 없는 왕후의 아이. 언젠간 왕이 되어 원하는 사람을 부군으로 두며 이 나라를 손에 쥘 그 아이가 점점 미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편지를 읽어주다가 결국엔 찢어버렸다. 옷은 상관없으니 입혔다.

그리고 그 지독한 불안감을 해소할 방도를 찾아냈다.

만왕이 달거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위홍의 눈길이 만왕에게 닿는 것을 알게 된 부호부인은

일을 꾸몄다.

"겨우 나의 지아비이자 왕의 동생으로 남겠습니까? 아니면 당신의 씨를 다음 왕으로 만들겠습니까?"

부호부인을 어미처럼 믿고 따랐던 만왕은 영화부인처럼 순박하게 웃으며 부호부인이 내온 차를 아무 의심 없이 마셨다. 만왕에게 부호부인은 어미 그 자체니까 그 사람이 주는 것은 무엇이든 좋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입은 예쁜 옷도 다 영화부인의 부탁을 받아 부호부인이 바느질해준 귀한 옷이었다. 그 모든 것이 사랑이자 안심이었다.

그렇게 조용히 시체처럼 잠이들었고 월성의 어느 방에서 만왕은 김위홍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것도 부호부인이 보는 앞에서. 잠에서 깼고 자기 옆에 벌거벗고 누워있는 김위홍과 자기의 모습을 보며 소리지르는 만왕을 안고 부호부인은 별 일 아니라고 오히려 좋은일이며 다 괜찮다고 말하며 만왕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데리고 나와 몸을 씻겨주며 금팔찌를 채워주었다.

"이거 각간님이 주라고 하신거예요. 저도 각간님만큼 공주님을 아낍니다. 각간님이 아니면 공주님을 지켜줄 사람이 없습니다. 저도 각간님과 함께 공주님을 돌볼거예요."

부호부인은 비릿하게 웃었다. 앞으로 이것보다 더한 일을 겪게 될 텐데 기대하라고

죽은 영화부인에게 또 어린 공주에게 속으로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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