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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lphin knows Jan 04. 2024

다섯 번째 계절

천 년의 주령구 08

"다 책상 아래로 들어가. 50분까지야!"

아이들과 내가 책상아래로 들어갔다. 무릎담요를 머리에 뒤집어쓰고는 대용량 야쿠르트를 마셨다.

졸음이 올 것 같았다. 지진대비 훈련이라 들어간 책상 아래는 꽤 아늑했다. 몸과 맘이 느슨해지니 생각이 다시 많아졌다.  

이곳에서 참 다양한 일을 겪는다.

일단은 예전에 살았던 때보다 훨씬 사는 게 편안해졌다.

일단 사는 곳도 그렇게 되었고, 엄마의 직장은 예전보다 보수가 나쁘지 않았고 역시나  선생님 덕에 여러 가지 지원을 받게 되어서, 예쁜 옷은 못 사더라도 간식과 학용품쯤은 원하는 걸 사는데 그래도 덜 망설이게 되었다. 아빠라는 사람이 내 인생에서 안 보이고 이렇게 엄마도 나도 평안해졌다면 그 아빠란 사람이 그동안 우리를 어떻게 갉아먹고 살았는지 알만하다.


여기로 이사 와서 딱 3주 뒤였다. 엄마가 그렇게 고통받을 때나 어려울 때도 절대 돌아보지 않던 친할아버지. 나에겐 그저 이기적인 노인일 뿐인 인간이 엄마에게 전활 걸었다. 엄마는 녹음과 스피커폰을 동시에 틀어놓았다. 그동안에 당한 게 많았는지 엄마도 엄마 나름대로의 방어진을 쳤다.

그 목소리. 자애로운 척 하지만 고집과 무식함이 뚝뚝 묻어나는 그 목소리엔 조금은 힘이 빠져있었다.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뭐... 다 아는 수가 있다. 우리 아들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맘이 아리고 너무 보고 싶은데 도저히 모르겠다. 너는 네 남편 어디 있는지 안 궁금하고? 의주는 잘 있냐? 어디 사는지 알려줘야 내가 애 먹을 거라도 사갈 거 아니냐?"

예전이라면 엄마가 그래도 늙은 사람이라고 기분 나쁜 이야긴 삼켰겠지만, 물리적 거리가 멀어져서 그랬는지 조금은 단호해졌다.

"저도 몰라요. 죽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인가요? 왜 이미 부부의 연이 끊긴 사이인데 가족인 척하시나요?"

"이런 싹퉁머리 없는 년!"

"바람피우고 심심하면 마누라 패고 사셨죠? 그래서 어머님도 일찍 돌아가신 거 아니에요? 결국 아들을 엄마 없는 자식으로 키워서 지 아비랑 똑같이 범죄자 망나니 만든 아버지가 할 말은 아니죠! "

"어떻게 한 마디를 안 지냐. 끊자"

"전화번호 바꿀 거예요."


엄마는 나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삐죽였다.

"엄마 나 쌍욕 할 뻔"

"하지 그랬어?"

"근데 욕도 아까워. 그러다 죽으라 그래"

엄마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핸드폰 번호를 바꿔버렸다.

신기하게도 그게 3월 초순이었고 거짓말 같이 다음 날부터 계절이 바뀌었다. 본격적인 봄! 개나리와 왕벚나무 목련이 등굣길을 환하게 꾸며주었고, 바람이 무척이나 부드러워졌다.


책상에서 생각에 푹 빠져 있는데, 바로 옆 자리에서 짝꿍 지연이가 뭘 하날 내게 던져줬다.

"이게 뭐야?"

"일단 봐봐"

딱 봐도 알 것 같았다. 그 14면체 주사위. 주령구. 그러나 면면에 종이로 글귀가 쓰여있었고 스카치테이프로 꼼꼼하게 잘 싸놓았다. 글씨가 아기자기하고 예쁜 게 딱 지연이 작품이었다.

"지난번 우리 분황사 갔을 때 하나 샀어. 너는 그저 먹을 것밖에 모르는 인간이라 주령구 빵 사서 쳐묵 하는 거나 했지? 나님은 이거 가지고 보드게임 하나 만들고 해 보려고 샀지!"

"야 너 보드겜 시나리오 또 쓰냐?"

지연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저번에 만든 보드게임 회사 시나리오 공모전에도 넣었다."

"대박쓰!"

지연이의 옆구릴 쿡 찌르며 웃었다.

"야 이건 그래서 뭔데?"

"이게 원래 신라 귀족들 술게임 할 때 썼던 거라잖아. 그걸 아즈텍 신화로 다시 풀어내서..."


"저기 거기 둘! 조용히 안 하면 진짜 지진 나도 확 내보내버린다!"

우리 목소리가 좀 높았나 보다. 나는 바로 나가서 90도로 허리를 꺾었다.

"쌤 죄송합니다. 조용히 할게요. 그러니까 살려주세요!"

"어휴 저거 말이나 못 하면... 들어가!"

지연이가 킥킥 대면서 웃었다.

"야 나머지 이야기는 학교 끝나고 해 줄게. 나 용돈 주기 왔음. 로제 떡볶이 어때? 울 집에서"

"무조건 굿이다!"


로제 떡볶이는 지연이의 아빠가 미리 시켜두셨다. 낯설었다. 안식년이 있는 직업을 지닌 아빠라 그런지 뭔가 여유로워 보였다. 집에 왔을 땐 그 아버지가 청소기를 들고 본인 서재에 들어가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해주시는 지연이 아빠의 표정이 참 신기했다. 아내와 딸을 때리거나 돈을 뺏지 않는 아빠도 존재하는구나? 그게 그저 보여주기 식이 아니란 걸 알게 된 게 바로 지연이 엄마의 평소 표정 때문이었다. 어느 때 봐도 참 편안해 보였다. 그리고 그 두 분이 나를 이유 없이 많이 좋아해 주셔서 또 신기했고. 지연의 집도 신기했고 지연이 자체도 똘끼가 넘치고 신기한 아이였다. 더 신기한 아이인 목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마 내게 가장 신기하고 재미있는 아이는 '김지연' 하나였을 거다. 대체적으로 남이 뭘 하든 무관심인데 막상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할 때 장점과 재미있는 점을 들어서 강조하며 이야기를 했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또 편안했다. 참 속 편한 애다 싶다가 또 이런 애가 있어야 나도 숨통이 트이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엉뚱한 이야기로 말을 트고는 지금 이 학교에서 가장 친해졌다. 강인섭이 한 짓에도 가장 화냈던 게 지연이고, 관악구에서 여자중학교 다닐 때 가장 친했던 '희선'이의 빈자리가 그렇게 채워져 가고 있었다. 모범생 같고 착하고 공감능력 뛰어난 언니 같은 아이는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나도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너랑 성향은 다르지만 너만큼 사람에게 무해한 아이가 있다고. 신기하다고.


지연이는 우드락 하나를 들고 왔다. 자기는 아날로그 감성이 좋다나?

"이게 바로 '케찰코아틀의 부름"이야!"

아즈텍 신화에서 이 세상은 총 네 번 멸망했단다. 거인의 시절, 원숭이의 시절, 화염의 비로 멸망한 시절, 그리고 홍수로 멸망했던 시절. 그래서 아즈텍 사람은 자기들이 사는 시절을 '다섯 번째 계절'이라고 여기고 예전과 같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계속 사람을 죽여 바쳤다고 한다.

웃겼다. 신이 죽어 만들었다는 태양은 왜 그렇게 약해 빠졌는지. 툭하면 빛을 잃고 날아가고. 그 작은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를 지연이는 그 시대를 스테이지로 만들어 14면체 주사위로 퀘스트를 수행하게 만들었다.  화투장 크기의 미션 보너스 카드도 만들었는데, 거기에는 공급할 수 있는 제물이 있었다. 멸망을 피해 달아나는 주인공들에게 기회를 주는 타임이란다. 곡식, 짐승, 황금 그중 사람의 심장이 가장 큰 포인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와, 좀 많이 하드코어 한데?"

"야 진짜 아즈텍 신화나 실제로 남미에서 일어났던 일에 비하면 매우 순한 맛이다."

그리고 영상을 보여주었다. 아즈텍 신화만 둘이 서 너 개를 본 것 같았다. 지연이의 아버지가 문화인류학과 교수라 그런지 이런데 유독 관심이 많았고 책도 꽤 많이 팠다고 한다.

그러자 뭔가 좀 기분이 씁쓸해졌다.

"신들이라는 놈들이 툭하면 삐지고 힘도 없는 인간들 피를 흘리고 죽여야 겨우 움직이냐? 참 찌질하기 그지없어"

지연이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때는 뭐 하나만 남보다 더 걸치고 잘 먹는 집안에 태어나도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아마 이 모든 신화 속에 담긴 이야기에는 '내가 매우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니 너네가 죽는 건 당연하다'일 거고 거기서 나왔던 신들은 사실 귀족들 아니었을까 싶어. 세뇌된 사람들은 순순히 죽었을 거고, 그게 아니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더 아프게 죽었을 거고."

지연이는 아즈텍 버전 퀘스트로 재포장된 주령구를 굴렸다.

"결국 뭐 다 게임의 말 같은 거지"

사실 알고 있었다. 보드게임과 주사위라면 환장하는 친구라 분황사에서 주령구 사러 달려가는 거 봤으니까.

그때 선생님이 이 나무 주사위에 대해 설명하면서 귀족들이 경치 좋은 곳에서 술게임 하며 서로 벌칙 주고 할 때 쓰던 거라고 했다. 재미있게 표현하긴 했는데 영 들으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빠가 풍기던 술냄새가 생각나서, 아빠가 빠져있던 그 주사위 도박인 다이사이. 그걸로 날아갔던 어릴 적 집이 생각나서 말이다. 그래서 그때 안 샀다. 주령구 빵을 사서 우걱우걱 먹었다. 이런 것들이 사라졌으면 좋겠어서 말이다.

그러나 이 친구가 이걸로 또 다른 걸 만드니 나름 흥미가 돋았다.

결국 모든 건 누가 쓰느냐에 달려있는 거다.

내가 겪어온 일들. 누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 아니었다. 엄마도 그런 일을 겪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계속 누가 주사위를 굴려 불행,폭력, 도박 이런 걸 나오게 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 반대되는 경우도 그랬다. 영영 괴로울 거 같았는데 처음으로 쉬었던 그 신림동 집, 그리고 그 여자중학교. 우릴 도와줬던  선생님, 착한친구 희선이, 재미있는 친구 지연이 그리고 이팝나무와 목이.

갑자기 무너진 건물과 지진과 해일. 화산폭발. 배의 침몰과 추락. 평생을 착하게 살아온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 하필 그 시절에 등장한 악인. 그리고 그들에게 우연히 주어졌던 기회.

깊은 수렁 앞에 있는 것 같았다. 무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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