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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lphin knows Mar 25. 2024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천 년의 주령구 11

큰 창으로 달빛이 들어왔다. 

그날 딱 이런 빛이었다. 하늘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밝았지만 묘하게 사람을 찌르고 베는 것 같은 그래놓고는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 자리에서 휘영청 밝았다.

앞으로 무시무시한 일들이 벌어지겠지만 그건 네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거다.

라고 달이 말하는 것 같았다. 옥령이 어린 목이를 안고 있었던 밤이었다. 그날 밤이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돈염이 왜 자꾸 못된 짓을 해대는지 화를 내며 걱정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날이 밝자 목이와 생이별해 이 방으로 끌려왔다.  

그러나 그때의 걱정이 지금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다시 만났다 해도 부서져버린 혹은 부서져 가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기에, 그날보다 더 달빛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때는 몰랐다. 자신만 끌려와 고통받을 줄 알았지 목이까지 그 꼴을 겪게 될 줄을 알지 못했다.


옥령이 갇혀있는 방은 다행히도 감옥도 골방도 아니었다.

김위홍의 천박한 취향을 맞춰주기 위해 부호부인이 옥령과 옥령의 처소를 재물을 써서 화려하게 꾸몄다.

그리고 김위홍이 언제고 드나들어야 했기 때문에 김위홍과 부호부인의 방의 건너편에 옥령의 방이 있었다. 그러나 갇혀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몸종이라고 하며 들락거리는 사람도 부호부인의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그 끔찍한 인간 돈염이 드나들면서 바로 옥령의 방에서 사술을 행하고, 목이가 귀족 자제들에게 노리갯감이 되었듯이 옥령도 김위홍의 노리갯감이 되기 위해 갇힌 그 화려한 방은 화려한 만큼이나 끔찍했다.

그 방에 치장된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흘러나왔는지 지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누구의 눈물과 누구의 억울함이 묻혀있는지 누구의 물건이 강제로 강탈당했으며 누가 이 모든 일로 인해 멸문지화를 당하고 굶어 죽거나 맞아 죽었는지. 혹은 사술을 위해 자기 자식을 억지로 제물로 빼앗겼는지... 

알면 알게 될수록 돈염이라는 인간에게 치를 떤 만큼 김위홍과 부호부인에 대한 혐오가 짙어졌다. 옥령의 혐오는 김위홍이 자신을 맘에 들어하며 곁에 두려 할수록 더욱 커졌다. 몸에 붙은 벌레. 그 수많은 다리가 주는 느낌 그 자체. 김위홍은 그걸 잘 알았고 옥령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하며 즐거워했다.

악취미다. 날이 갈수록 그 악취미는 더 괴상한 모습으로 진화했다. 

돈염은 그보다는 한 수 아래였다. 그 쓰레기는 뭐든 팔아서 한 탕해먹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수단으로 여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저 순간적인 쾌락에 중독된 비열한 기회주의자였을 뿐이다. 

모든 일이 사실 돈염때문에 일어난 일이지만 이미 나라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 뒤에는 왕의 동생이자 각간인 김위홍이 있었다.

부호부인을 마주칠 기회가 종종 있었어도 부호부인은 따로 옥령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주로 자기가 공주 때부터 키운 만왕에게 들락거리느라 바빴다. 그러나 가끔. 가끔 옥령을 볼 때 그 서늘하고 비틀린 심경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자기 눈앞에 일어나는 일들을 눈을 뜨고 있어도 아무 상관하지 않았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그저 관망했다. 그러나 옥령은 분명히 부호부인이 하는 말을 마음으로 들었다.

'너도 당해라. 나도 원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니니 너도 그래도 된다'

그 사람도 어릴 때부터 원치 않게 박살 난 사람이었다. 월성은 비밀이 없는 곳이었다. 지금 목이가 당하는 일 혹은 옥령과 옥령의 처소에 끌려온 어린 여자아이들 혹은 만왕이 어릴때부터  김위홍에게 당하는 일들을 겪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옥령은 발해에서 신라로 내려올 때 참 많은 사람을 만났고 살면서 별 일을 당해온 사람들을 만났다. 그 사람들 중 부호부인처럼 마음과 생각이 변한 사람이 있는 반면 오히려 그걸 품고 더 아픈 사람을 구해내는 사람을 만났다. 다 본인의 선택이다. 부호부인은 부서진 마음이 파편이 되어 그걸 남을 찌르고 망가뜨리는 것으로 한을 풀려고 다짐했던 것 같다. 그래서 김위홍을 이용하려고 했지만 사실 부호부인도 김위홍의 손아귀 안에서 이용당하고 있었다. 스스로는 자기를 절대로 높일 수 없는 사람. 이미 다 가졌지만 결국 하나를 가지지 못해 모든 것을 망가뜨리는 대가로 자신이 신이 되어 모든 것을 좌우하기를 바라는 사람. 이 모든 상황으로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바로 김위홍이었다. 옥령은 그전까지 돈염에게 '가장 오만하고 비열한자'라고 했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누구도 김위홍 같지 않았다. 


김위홍은 처음엔 왕이 되길 바랐지 신이 되길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부호부인이 만왕을 김위홍의 손아귀에 넣어준 뒤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누가 왕이 된들 무슨 상관이랴. 내 맘대로 할 수 있으면 그만인데. 대충 대접해 주고 나는 대대손손 부귀를 누리리라'

때마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서라벌 사냥터에서 사냥을 할 때  '영원을 살며, 대대로 부귀를 누리실 분'이라며 고승 복장을 돈염이 무릎을 꿇고 사술을 부렸다. 

김위홍은 눈을 뜬 채로 천녀들이 자기를 감싸는 꿈을 꾸었고 기가 막힌 향기 속에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하슬라에서 큰 뜻을 아시게 될 거고 귀한 사람을 만날 거다'라고 이야기했고, 돈염은 부호부인에게 '천녀의 현신'이라고 부르며 왜에서 난 야광조개 머리장식을 건넸다.

그렇게 함께 하슬라로 향했다. 옥령은 돈염이 무슨 짓을 했을지 안 봐도 알았다. 돈염이 슬쩍슬쩍 말하는 일이 하나씩 일어났다. 갑자기 폭포가 거꾸로 흐른다거나, 화살을 맞고 죽은 사슴이 일어나 김위홍에게 다가온다거나. 그렇게 돈염은 다른 사람을 사로잡았듯이 위홍과 부호를 사로잡았다.

결국 하슬라에 도착했을 땐 돈염에게 큰돈을 꿔준 부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엔 이 돈염이라는 놈이 헛소리를 했다면 그에게 마지막으로 내어준 야광조개 머리장식을 빼앗고 잡아 죽이려 했으나 '왕 빼고는 가장 귀한 두 사람'을 직접 마주하게 되니 돈염을 죽일 생각을 버리고 그에게 협조했다. 이 나라에서 김위홍과 부호부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수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고 산채로 고문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그중 어린아이도 수십 명 되었다고 했다. 그 부자는 돈염이 왜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가야유민이었다. 돈염에게 참을성 있게 돈을 계속 대준 것도 돈염이 불러서 써댄 각종 귀신들의 덕에 돈을 불려 왔기 때문이었다. 대가는 확실하게 지불해 왔다. 그들이 부르는 신은 항상 사람의 피와 살에 목말라했고, 원한으로 울부짖을 때 기뻐서 더욱 날뛰었다. 

그렇게 이 모든 일들은 시작되었고 옥령과 목이는 이곳에서 피에 절은 주사위 놀이의 장난감이 되어 고통받고 있었다.


돈염의 요구는 분명했다. 

'너와 네 아들의 고통을 끝내고 싶다면 네 거울을 김위홍과 나에게 바쳐서 시키는 일을 해라.'

부하가 되어, 그들이 지금 하는 일을 옥령더러 다 해내라는 것이었다. 돈염은 알았다. 이미 사술에 찌든 자기에게는 악신들이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그가 자랑했던 능력도 떨어져 가던 참이었다. 능력이 떨어져 나갈수록 그는 더 피냄새를 풍기는 사술을 거하게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돈염에게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그것들은 사실 돈염이 아니라 '옥령'이 목표였다. 그러나 옥령은 경교 공동체의 사람이고 돈염이 부르는 악신들과는 태생적으로 척을 지고 있었다. 그래서 돈염에게 굳이 옥령을 꼬여내게 하고 아이까지 가지게 한 것이라는 걸 돈염은 알게 되었다.  그것들은 무너뜨릴 재미가 있는 것 타고난 능력이 있으며 자기들이 부리던 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색다른 자'를 원했다. 다. 모든 타락한 것들이 그렇다. 돈염 자신도 부호부인도 김위홍 까지도. 그러니까 비슷하게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다.


옥령은 창문은 활짝 열었다. 달빛이 더욱 날카롭고 차갑게 다가왔다. 마음을 다해 하늘에게 울부짖었다. 

'내 아이를 보호하소서. 내 아이를 보호하소서. 다시는 더러운 것들이 손을 못 대게. 내 영혼을 보호하소서. 이들이 나를 죽였나이다. 이미 저는 죽어서 껍데기만 남았나이다. 그러나 저들이 하는 일을 할 수 없나이다. 내 아이의 어미로서 도저히 그 일을 할 수 없나이다.'


눈 속의 달이 흐려질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옥령은 얼굴을 정돈하고 

자리에 돌아가 무언가를 썼다. 그리고 거울을 만들어서 목이에게 네 글자를 보여주었다.


月鏡一曲

월경일곡


목이는 그날도 만신창이가 된 채 옥령과는 먼 월성의 처소에 있었다.

잠을 이룰 수 없어 그저 달만 바라보고 있을 때 

엄마 옥령이 보여주는 네 글자를 보게 되었다.


"엄마 이게 뭔가요? 잠이 안 오세요? 제가 노래를 부를까요?'

"아니"

"엄마 울었어요?"

"응 울긴 했는데 울었더니 좀 맘이 나아지네. 너도 울어도 돼"

"아니에요 많이 울었어요. 저는 울보 엄마 얼굴 보니 맘이 좀 괜찮네요."

"내가 노랠 불러줄게. 잠이 잘 올 거야"

"네 불러주세요"


옥령은 목이가 아기 때 등에 업고 부르는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목이는 눈을 감고 그 곡을 듣고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날만큼은 돈염이 바빴는지 아무 방해도 하지 않아 옥령의 노래를 끝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흘 후.

옥령은 월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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