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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lphin knows Nov 05. 2023

하슬라, 허슬러

천 년의 주령구 06

목이는 자신이 있었던 시간을 의주에게 듣고 나서는 처음으로 자기가 얼마나 그 상태로 묶여 있었는지 실감하게 되었다. 그전엔 그래도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새삼스레 그 이야길 들으니 처음에 갇혔던 때보다 더 답답해졌다.

처음엔 주야로 소리 지르고 울었다. 눈물이 흐르는지 아닌지도 확인은 할 수 없었고 그냥 높이와 깊이를 확인할 수 없는 공간에 홀로 있는 채로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미칠 듯이 졸음이 왔다. 잠은 점점 더 길어졌다. 가끔 깨면 그저 눈앞에서 나무 바깥에서 지나는 풍경과 사람들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배고픔도 목마름도 느끼지 못한다는 거.

그리고는 한 편으로는 안심했다. 더는 '그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그 점이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게 되도록 잠이 드는 편을 택했다. 꿈을 꾸면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고스란히 꿈속에서 보이거나 조금은 뒤틀리고 변형되어 나타났다.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꿈은 이모 '진령'이 자기를 품 안에 재우면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해 주던 순간이었다. 살아가면서 그나마 맘이 놓였던 순간이었다.

이모는 목이를 토닥거리며 넋두리하듯이 긴 이야길 늘어놓곤 했다.


"어릴 적 봤던 네 아비. 그 씹어먹을 새끼. 딱히 볼 맛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었지만 제법 말도 가려할 줄 알고, 일을 꾸리는 걸 보면 머리도 꽤 총명해 보였거든. 물론 그때도 이 사람 저 사람 사주받아 주술 비슷한 짓을 하니 옳은 일 그른 일 가리진 않고 했었지. 그래도 내가 지어미는 있다. 자식도 곧 나올 거라는 생각은 있었던 것 같아. 네 아비도 언니처럼 가족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네가 제법 언니 뱃속에서 자라 배가 불룩했을 때 그 인간이 하슬라에 사는 높으신 분에게 큰돈을 받고 뭔가를 해주러 가게 되었더라고. 언니는 내가 이곳에 내려올 때처럼 꿈을 꾸고 바른말을 했어.


'아직까지는 네가 네 가족을 아끼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너도 알고 하늘이 알고 있는 일이다. 이제까지 사술을 부리며 이 사람 저 사람 건너 다녔고 투전판을 다니며 지아비 답지 못하게 해 왔던 일들을 안다. 그러나 너의 탐욕을, 그리고 공허를 한 번의 요행으로 채우려는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하슬라에서 너는 두 가지를 만날 것이다. 큰 재물, 그리고 큰 구렁. 큰 구렁이 큰 재물은 물론 너의 모든 걸 다 삼켜버릴 거다. 선택을 해야 한다. 그냥 그 일을 거절하고 역의 일을 도우며 살아라. 아들을 얻을 거다. 아비 노릇이란 걸 하면 네가 어릴 적부터 겪은 일로 만들어진 그 큰 구렁이 메워질 것이다. 한 번에 되지 않겠지만 서서히, 단단하게'


그런데 항상 그렇지? 언니의 말은 맞는 말이긴 한데 꼭 사람 귀에 달지가 않아. 언니도 그냥 대충 핑계 대며 조심하라고 하고 싶었다네. 그런데 그게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맘대로 안되었다고 하더라.

그 새끼도 마찬가지였어. 그냥 눈이 멀어버렸지 뭐. 그 일이 있기 전에 투전판에서 재물을 얻는 족족 날렸고 빚도 생겼나 봐. 그걸 메울 욕심으로 좀 더럽게 사술을 부렸어. 그 기회가 '제물을 바친 대가'라고 생각했으니 언니 말이 들렸겠어? 그렇게 언니를 내팽개치고 하슬라로 가서는 그 높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어린아이를 잡아 죽이고 파묻고 뭔가를 불러내서 소원을 이뤄주고는 서라벌에서 몇 대는 떵떵거리고 살 정도로 재물을 얻었다고 하더라고. 하슬라의 일은 지금 서라벌에까지 퍼졌어. 거의 한 계절동안 한 고을 전체에 피냄새가 진동했다고 하더라고.

그 와중에 언니에게 편지를 보냈어 '우리가 부유해졌으니 역을 그만두고 저기 월성 근처에 들어가 떵떵거리며 살자고' 너를 낳기 이틀 전이었어. 언니는 토악질을 하면서 기절할 정도로 울었어. 언니가 너를 낳을 때 나만이 곁에 있었는데 네가 그 일로 잘못될까 봐 걱정이 깊었어. 다행히 너는 이렇게 태어나고 자라주었다."


돈염은 만족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었다. 거짓말에 거짓말에 거짓말을 거듭해도 목이 말라 보였다. 그리고 가지고 가지고 또 가져도 계속 모자라 보였다. 원하는 것을 얻기까지는 그 거짓말도 참 예쁘게 잘했다. 가끔은 허술하게 할 필요가 없는 사소한 일까지 거짓말을 해서 '실없는 사람' 혹은 '불쌍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다. 사실 그것 조차도 필요를 위해 꾸민 일이었다.  

돈염이 아직 옥령 그리고 옥령의 자매인 진령과 살 때에도 손님을 끌어다 주고, 살림을 보태고는 했지만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목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그냥 없는 사람처럼 돌아다녔다.

그렇게 돈염의 결연한 의지로 엄마 옥령이 월성으로 끌려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목이도 돈염에게 끌려가게 된다. 진령은 그 와중에서 몸 곳곳에 칼을 맞고는 조카를 뺏겨야 했다. 진령의 눈에 마지막에 비친 건 울며 발악하는 조카의 모습이었다.  

목이의 모든 세상이 무너졌다. 그나마 잠들 수 있었던 품도. 목이가 너무 어릴 적이라 혹은 태어나지 않았을 적이라 전혀 몰랐던 그동안의 이야기도.


이후 목이와 옥령은 같은 월성에 있었지만 옥령과 목이는 서로를 직접 만날 수도 손을 잡을 수도 없었다.

철저하게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들은 겨우 그들이 가진 능력인 그 '거울의 힘'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다.

그게 같은 공간에 있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좀 더 또렷하게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꿈의 공간에서 그러나 현실보다 더 또렷하게. 그리고 옥령과 목이는 잘 알게 되었다. 목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옥령은 절망했다. 큰 구체처럼 나타난 거울 속에서 소리도 못 내고 우는 목이를 안아줄 수 없었다.

 

일 각이 지나지 않아 돈염이 그들에게 차례차례 찾아와서 짧은 이야길 하고는 휙 나갔다.

"판돈 없이 돈 버는 건 사기야. 자식이야 또 낳을 수 있으니 네가 네 자식을 양보해라. 어차피 내가 없으면 너희도 없는 거다. 이 희생, 더 큰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옥령과 목이에게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말한 말이다.

그다음 날 목이와 옥령은 처음으로 멀찍이지만 같은 전각에서 '돈염'을 보게 된다. 금테 두른 전각은 눈이 부셨다.  그곳의 주인은 만왕의 숙부인 각간 김위홍 이라고 했다. 그 사람은 높으신 분답게 금박을 넣은 비단 웃옷에 모자엔 공작새 깃털을 꽂고 있었다. 그 옆엔 머리에 청보석과 유리알로 장식한 슬슬전과 역시 금박 넣은 비단옷을 입고 있는 부호부인이 아무 표정 없는 목각인형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돈염에게 새 의복과 새 이름을 내어주었다고 한다. '현각대사(賢覺大師)'

구 돈염. 현 현각대사는 화려한 의자에 앉은 그들 앞에 가만히 무릎을 꿇고 절했다.

잿빛이었지만 능라로 된 장삼에 황금빛에 수가 빼곡히 높인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머리는 언제 저렇게 밀어머린 걸까? 눈썹과 눈썹사이에 붙인 저 반짝이는 유리알은 뭘까? 두 사람은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 요란한 소리를 내는 유성장. 그는 지장보살의 현신인 듯 표정까지 엄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태도는 비굴한데 엄중한 표정 그리고 어느 승려도 걸치지 않았던 화려한 옷. 무엇보다 자기 키보다 훨씬 크고 금과 유리알을 입힌 저 소리 나는 석장이 그 전각 전체의 분위기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부처를 알지도 못하고 부처의 길도 모르고 부처의 마음도 모르는 자, 지장의 현명함 무엇보다 인간을 향한 애틋함과 용기를 도저히 이해 못할 자가 누구보다도 그 둘을 흉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벌어졌다.

그 각간 부부는 물론, 어미 옥령의 앞에서 억지로 목이에게 잠드는 약을 먹인 뒤 돈염이 직접 목이를 거세해 버렸다.

옥령이 비명을 지르고 울기 시작하자 곁에 서있던 병졸들이 옥령을 때려 기절시키고는 그 전각에서 둘러메고 나가 버렸다.

목이는 기절해 있었기에, 피를 흘린 줄도 모르고 피를 흘리고 있었기에 그들의 말을 듣지 못했다.

듣지 못해 다행이었다.


돈염. 아니 현각대사는 조아리던 고개를 들고 말했다.

"각간님. 이렇게 저의 대는 끊어졌습니다. 더 큰 것을 바치고 이룰 거라는 저의 진심입니다. 각간님이 그리고 각간님의 자손과 영화만이 오로지 제가 기댈 것이 되었습니다"

각간 위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어떤 일을 시작하려느냐."

"그리고 이 일은 진심만은 아닙니다. 제가 힘을 얻기 위해 큰 희생을 치르고 부른 분이 이게 필요하다 하셨고

각간님과 함께 할 일들을 제게 알려주십니다. 아이의 어미가 남았습니다. 그 어미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돈염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도 할 일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저도 각간님도 오래, 생각 보다 더 오래 영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며칠이 지나 목이는 자기가 원래 갇혀있었던 월성 안의 어떤 곳에서 깨어났다.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많이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그 모든 걸 특별한 방법으로 지켜보고 있었던 옥령도 목이만큼 아파했다. 그리고 황망했다. 돈염 그 자신은 어떤 것도 잃지 않고서도 '희생'을 운운하는 게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른 수건을 쥐어짜도 물이 나온 다는 말. 그러나 그 마른 수건에는 돈염 자신이 들어있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아마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라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그 두 사람에게 더 빼앗길 것이 남아있었다. 그것만은 두 사람이 꿈으로도 어떤 능력으로도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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